Bang & Lee
방앤리 (b.1977, 71)
방자영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독일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느, 미학, 프랑스
이윤준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미디어 아트, 독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개인전
2018 <초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관 기념전시실 (경주, 한국)
2017 <TANK•ful + RE•volve>, 문화비축기지 (서울, 한국)
2016 <Translations of Enlightening Period.>, 가나아트센터 언타이틀드 (서울, 한국)
<Transparent Study>, 에스플렉스센터, 디지털미디어시티 (서울, 한국)
2014 <esc(space)>, 조명박물관 (양주, 한국)
<Friendship is Universal>, 대안공간 루프 (서울, 한국)
2013 <Lost in Translation>, 아트센터 나비 (서울, 한국)
2012 <Freindƨ in the living room>, 조명박물관 (양주, 한국)
<Nonzerosum Society>, 인사미술공간 (서울, 한국)
2009 <FARM>, ZKM/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카를스루에, 독일)
2008 <Anonymous Reports>, HfG Karlsruhe (카를스루에, 독일)
주요단체전
2016 <산책자의 시선>, 경기도미술관 (안산, 한국)
<Total Support>, 토탈미술관 (서울, 한국)
<Object>, 가나아트센터 언타이틀드 (서울, 한국)
<60sec ART>, 사비나미술관 (서울, 한국)
<Animamix Biennale>, MoCA Shanghai (상해, 중국)
<Light, Color & Play>, 조명박물관 (양주, 한국)
<you, the living>,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한국)
2015 <미래는 지금이다!>, La Friche Belle de Mai (마르세유, 프랑스)
<APMAP yongin 2015 – researcher’s way>,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용인, 한국)
<피스마이너스원>,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Butterflies 2015>, 아트센터 나비 (서울, 한국)
2014 <미래는 지금이다!>, 21세기 로마 국립현대미술관 (로마, 이탈리아)
<Gate-Opener>, Beijing Commune (북경, 중국)
<Open Sailing>, 제주 ICC (제주도, 한국)
<A Garden of Million Layers >, 남이섬, (남이섬, 한국)
<오작동 라이브러리>,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Daily Reflection>, 토탈미술관 (서울, 한국)
<Butterflies 2014>, 아트센터 나비 (서울, 한국)
2013 <Daegu Media Art ZKM - Better than universe>,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한국)
<Oceans, Earn Names and Fame>, 국립해양박물관 (부산, 한국)
<Open Creativity, Open World>, 코엑스 (서울, 한국)
<Open Set – The Devil is in the Details>, 아르코 미술관 (서울, 한국)
<2의 공화국>, 아르코 미술관 (서울, 한국)
<IT SUPPOSED TO BE BLACK & WHITE>,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
스튜디오, 세마 난지홀 (서울, 한국)
<4 Dialogues >,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세마 난지홀 (서울, 한국)
<Residency, NoW>, 송원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2 <대구사진비엔날레 – 사진다움!>,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한국)
<제 7회 서울 미디어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 Spell on you>,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09 <신화의 전시 – 전자 테크놀로지>, 백남준 아트센터 (용인, 한국)
2008 <Experimenta+>, Nancyhalle (카를스루에, 독일)
<제 3회 스페인 세비야 비엔날레 – Discover YOUniverse>, 안달루시아
현대미술관 (세비야, 스페인)
2006 <KunstComputerWerk>, ZKM (카를스루에, 독일)
레지던스
가나 아뜰리에 (가나아트센터, 장흥, 한국)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문화재단, 인천, 한국)
세마 난지 레지던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Guest research fellow (HfG Karlsruhe, 카를스루에, 독일)
Artist-in-Residence (ZKM, 카를스루에, 독일)
Artist Statement
I. 시간 – 현재 (Time – the present)
1년 사이 작업 제작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작은 기여를 모아 그것들을 중요한 무언가로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설치는 기본적으로 무대와 그 구성에 따른 라이트 설치의 변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변형된 설치의 공간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실시간 참여가 라이브로 프로젝션 된다. 바퀴 달린 혁명/공전(REVOLUTION)과 RGB로 반짝이는 색색의 조명은 원형 무대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구경할 수 있는 자리와 캡처되는 스팟이 무수한 모자이크 데이터 이미지와 섞여 스위치 되는 영상이 공간을 둘러싼 순환 구조의 틈을 채운다. 무언가 진행 중이며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순간은 끊임없이 현재에서 반복된다.
II. 라이브! 생방송 뉴스가 아닌 (Live! Not on-air news)
무대 위 조명을 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제나 ‘라이브(live)’이며 ‘재방송(re-run)’되지 않는다. ‘파티와 허튼짓(party and bullshit)’을 하며 TV, SNS, 그 외 다른 형태의 오락거리에 빠져 있는 동안 밖에서는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는 하찮은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성공한 혁명을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역사를 쓸 수 있다. 이러한 순간은 매일매일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
III. 공전, 축을 중심으로 한 회전 (Revolution, about the axis of rotation)
‘Revolution’의 어원은 ‘회전하다’, ‘굴리다’를 뜻하는 라틴어에 ‘다시’라는 접두사가 더해져 ‘한 바퀴 굴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라는 의미이다. 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 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프로덕션’이라는 프레임에서 이 기관차는 그런 운명을 맞이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도 역시 프로덕션이라는 산물의 일부여서 스스로 나사(screw)를 조이며 예술가 되기(becoming-artist)를 연습(practice)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예술가 만들기(making-artist)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 변화를 꿈꾸고 있다.
IV. 무한 루프, 거리 없는 추진 (Infinite loop, propelled with no distance)
거리, 시간, 사색의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우연성과 불확정성, 그리고 순환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반복성은 광범위하지만 약한 연결을 만들어 낸다. 유동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정보자본주의 시장에 ‘자동축적’이라는 거대한 잠재력을 불어넣는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의 엔진이 이 힘으로 가동되고 있다면 RPM(revolutions per minute: 엔진, 음반의 회전수 척도)의 수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회전은 빠르지만 충분한 거리와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초고속/실시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는 발열량이 증가하고 노이즈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프로덕션도 이러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 여유 공간이 없을 때 추진되는 프로젝트는 방향성을 잃고 관계된 것들 사이에 중력을 무너뜨리며 과부하에 걸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프로덕션은 상호의존적인 환경에서 형성된 궤도의 한 점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질주한다. 새로운 프로덕션은 이 마이크로화된 네트워크 세상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하지만 반복되는 과정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고 그 빗겨남은 어떤 틈을 형성한다. 벌어진 틈은 시작과는 다른 거리를 생성한다.
V. 쇼타임, 달빛 안에서 (Showtime, au clair de la lune)
영화가 끝날 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기여에 관한 일종의 존경심을 표하는 나름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힌트가 나오거나 다음 예고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의 순간이 스크린 위로 흘러간다. 물론 각종 로고와 저작권 표시를 끝으로 극장 안의 조명이 켜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내부와 외부를 관통하게 하는 실험을 거쳐 나선형을 그려나가는 순환적인 구조에서 제4의 벽(the fourth wall)은 이미 허물어져 있다. 후기 산업사회의 생산품으로 만들어낸 설치의 시각적 지시성과 대상의 구체성은 계획된 프로덕트 디자인과 연마된 기술적 실현능력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흐릿해 보인다. 이러한 설치의 공간에서 우리는 설치물의 위치를 임의로 발견하거나 스스로 위치를 자리 잡을(positioning) 수 있다.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떤 예술품이 아니며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는 응축된 시간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늘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찰나임을, 또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이 달라짐으로써 서로 ‘자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깨닫는 것이다. 적어도 모호함은 매력적이다. 알쏭달쏭 불분명하고 막연한 것은 해석의 여지와 상상, 다름 혹은 다양성에 관해 생각해 보는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 역시 프로덕션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끝으로 갈 수록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모호함의 연속에서 이 최소한의 개입(intervention)이 작은 참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기여에 관한 일종의 존경심을 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달빛 안에서 쇼는 곧 시작되고 금방 끝날 것이지만. (2015년)
I. Time – the present
Changes that occurred in the one-year work process, served as a tool to create something important driven by the collection of small contributions of many people. In this installation work, basically the stage and light installation based on its configuration are modified. The real-time engagement happening in this modified installation space is projected in live. The LEDs glittering with ‘revolution on wheels’ and colorful RGB halogen lights surround an arena. The video being switched on where the audience stands and captured spots combined with numerous mosaic data images fill in the cracks of the circular structure surrounding the space. Moments where something is going on and which are unpredictable repeat in the present.
II. Live! Not on-air news
It is not like turning on the light on the stage. Revolution might not be televised. It is ‘live’ and there is ‘no re-run’ at all times. There might be a change outside, quote “until then you know and I know will party and bullshit”, unquote, while being immersed in TV, SNS and other forms of entertainment. However, engagement of many people could make a trivial event into something important. Moreover, a history could be written to change a successful revolution into a legend. These moments may occur in our life every day.
III. Revolution, about the axis of rotation
The word ‘revolution’ from the Latin words ‘re-‘ and ‘volvere’ meaning “a turning around” or “rotating in a circular course” back to a starting point. Revolution, as “the locomotives of history” are on wheels. The wheels are interlinked with numerous gears while being connected to one another through a sophisticated device. Generators and motors roll their wheels in a high speed. The power moving forward through constant rotations makes us advance, but we cannot stop at this speed and in this bond until the route changes. In the frame of ‘production,’ this locomotive was designed to be destined that way. We are also a part of the output of the production, so we are practicing of ‘becoming-artist’ by tightening the screws ourselves. We dream of changes that have not come yet in a place of ‘making-artist’ by someone.
IV. Infinite loop, propelled with no distance
When the space for distance, time and thought is reduced, repetition that fails to get out of the contingency, uncertainty and a circulating chain leads to a broad and yet weak connectivity. The new relationship formed based on a flexible and loose network imbues big potentials of ‘automatic accumulation’ in the information capitalistic market. When the engine of our society is empowered by this, the value of RPM (revolutions per minute) would increase. The communication that occurs in the high-speed/real-time society where the speed of revolutions is high, but without adequate distance or time would have a higher amount of heat and noise. The production mentioned here has this process. A project carried on without much breathing space would lose its directions, collapse the inter-gravity and end up being overloaded. It would be because our production merely takes up one point of the orbit formed in the mutually dependent environment. We run toward an unknown destination. A new production is repeated in this micro network would like a repeat mark. However, subtle differences occur in the reiteration and stepping away from it would form a crack, which would then generate a different distance from the starting point.
V. Showtime, au clair de la lune
There might be many reasons for watching the closing credits after a film finishes roll up. It might be a gesture to express some respect for the contribution made by many people. The moment of expectation that there will be more hints or a trailer might come up flows onto the screen. A light might be on in a movie theater with the indication of various logos and copyrights, but we cannot leave the seat easily. The fourth wall has already collapsed in a circulating structure where there is no internal-external boundary and a spiral is drawn following an experiment of penetrating inside and outside. Visual indication and object specificity for the installation created using products in the post-industrial society look still fuzzy, although they reveal the well-planned product design and fine-tuned technical implementation capacities. In this space of installation, we can arbitrarily discover the locations of the objects and position ourselves there. Filling the space up is not some artwork nor some condensed time to appreciate the artwork. It is the moment we realize where the boundary of each other’s ‘positions’ is obscure as our given roles and circumstances differed. Obscurity, at least, is attractive. Something enigmatic, ambiguous and uncertain would give way to time and space to rethink about imagination, differences or diversity. This is nothing new in the production mentioned above. However, this minimal intervention could be small engagement in the repeated obscurity where reaching the end would drive one to reach the starting point again and hopefully, could express some respect for the contribution of many people.
Even though the show in the light of the moon (au clair de la lune) would begin soon and end shortly. (2015)
Review
영구–운동–사진
김해주 독립 큐레이터
희곡 위비왕으로 잘 알려진 19세기 말의 작가 알프레드 자리(1873-1907)의 마지막 작품은 쉬르말 <Surmâle (Supermale)>(1902)이다.
이 소설에서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페달을 돌릴 수 있는 자전거에 타고 열차를 상대로 일 천 마일 경주를 벌인다. 이들은 모두 영구–운동–음식(perpetual–motion–food)’을 공급받아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끊임없이 페달을 돌린다. ‘기계–몸’의 사이클리스트들은 죽어가는 동안에도 페달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쓴 알프레드 자리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형이상학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를 패러디한 파타피직스는 수수께끼 같은 의사 과학을 뜻한다. 형이상 밖의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과학으로, 상상의 공간과 상상의 기술에 대해 묘사하며 상상적 해결책으로서의 과학을 제안한다. 한 마디로 ‘비이성적’인 과학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작가들이 하는 작업의 방식과 실험들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방 & 리의 신작 <Arena Tour – Machine>의 계획과 드로잉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알프레드 자리의 이 소설이 떠올랐다. 소설에 등장하는 몇 가지 모티브가 이 작업과 연결되면서 머릿 속의 자전거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Arena Tour – Machine>는 세 개의 스크린과 카메라, 모니터 등으로 구성된 복합적이고 거대한 설치 작업이다. 작품은 전시장의 일부를 원형으로 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다가갈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관객이 작업 안에서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무대는 모니터, 조명 등의 장치 등을 통해 지정되고 그 안에 서로 마주보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영원히 지연되는 피드백 영상을 만들게 된다.
작품의 제목인 <Arena Tour – Machine>는 원형의 무대 또는 경기장을 의미한다. 공연장으로서의 무대(scene)나 극장이 아닌 고대 원형 경기장의 의미에 가까운 아레나를 제목으로 사용한것은 치열한 세계의 축소판으로서의 장소적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이 스스로를 무대에 선 배우이자 경기장에 놓여진 존재인 이중의 상태로 놓여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아레나의 기본적인 형태와 이로 인해 연상되는 과열된 에너지는 영구적인 회전 상태이라는 작업 전반의 운동성과 연결된다. 한편 아레나의 벽면과 바닥의 기반이 되는 형태인 삼각형 역시 반복성을 보여준다. 자연계에서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동일하게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 사이의 패턴의 유사성과 순환성을 드러내는 이 프랙탈 구조 역시 작업 전체를 감도는 생각과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한 두 작가의 노트에는 ‘바퀴달린 혁명’에 대한 글이 등장한다. 혁명(Revolution)의 어원이 ‘회전하다’, ‘굴리다’를 뜻하는 라틴어에 ‘다시’라는 접두사가 더해져 ‘한 바퀴 굴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더한다. “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 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거대한 혁명은 세상을 선형적으로 전진하게 이끄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노선 안에서 회전 한다는 것이다. <Arena Tour – Machine>는 이처럼 전진하지만 끝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마찰만을 축적하는 세계 내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인간의 모습을 구조화한 미니어쳐이다.
과거 알프레드 자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구적인 움직임과 회전은 20세기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공회전과 과부하로 인한 폭발의 예감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것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가 서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커지는 요즈음이다. 절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2016년의 서울은 역사의 비극이 마치 프랙탈처럼, 또는 회전하는 운동처럼 짧은 주기와 긴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한 루프의 세계인 이 <Arena Tour – Machine>에서 화려한 조명이나 영구적 회전으로 만들어진 관객들의 이미지는 축적되는 동시에 사라진다. 카메라와 TV 앞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현실에 대한 자각을 이루고, 또 탈출을 꿈꿀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겨울 하나의 궤도 안에 움직이는 혁명의 트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이 트랙 위에 놓인 동체는 스스로 폭파되어 버릴까?
Perpetual–Motion–Picture
KIM Haeju ( Independent Curator )
The last work of a surrealist playwright Alfred Jarry (1873-1907), best known for his play Ubu Roi (1896), is Supermale (1902).
This novel tells a story of five persons who are riding 1,000 miles on the five-man bicycle, having a race with a locomotive. Powered by a “perpetual–motion–food”, they keep dealing as if they were a machine. These ‘machine-body’ cyclists never stop pedaling even at the moment of dying. The author of this novel was also the founder of “Pataphysics.” As a parody of metaphysic, it refers to a mysterious pseudo-science: a science dealing with the phenomena outside of the world of metaphysics, a science of imaginary solutions, discussing imaginary space and imaginary technology. In a word, it is an ‘irrational’ science, which seems similar to how artists generally work and experiment.
Looking at the plans and sketches of Bang & Lee’s recent work, Arena Tour – Machine, I was reminded of this novel by Alfred Jerry that I had long forgotten. As some of the motifs of the novel were associated with this work, the wheels of the bicycle in my mind begin to spin, in gear with each other. Arena Tour – Machine is a complex large scale installation, composed of three screens, a camera, a monitor, and so on. It occupies a part of the exhibition hall, which is a round shape to serve as the stage. The audience is naturally drawn to this stage and experiences the work inside of it. The stage is designated by such devices as a monitor and lighting and the cameras which are placed inside the stage, facing each other, produce eternally delayed feedback images.
The title Arena Tour – Machine means a round-shaped stage or playing field where sports events take place. The artist’s choice of the title, ‘arena,’ the central area of an ancient Roman amphitheater, neither the stage as a performing stage nor a theater, is to highlight the placeless of the world as a fierce battle ground. It also implies that the viewers looking at themselves in the arena are in a double state, that is, that they are both an actor standing in the stage and a player in the arena. This essential form of the arena and the overheated energy suggested by it is related to the state of permanent rotation as the movement embedded in the whole work. On the other hand, the triangle shape which basically forms the wall and floor of the arena symbolizes repetition. This fractal set, in which a smaller structure endlessly repeats itself in exactly the same was as a larger structure does, showing the analogy and circularity of the patterns found in the microscopic and macroscopic worlds,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idea underlying this work.
In the artist note for this work, there is an article about ‘revolution on wheels.’ They explain that the etymology of the term ‘revolution,’ a combination of a Latin word meaning ‘to rotate,’ ‘to roll,’ and a prefix meaning ‘again,’ implies ‘completing an entire cycle and return to the original position or condition.’ And they added that “locomotive of history or revolution has wheels. The wheels are interlocked with one another through fine devices and their cogs gear smoothly. The generators and motors move the wheels, speeding them up. This revolving and advancing power keeps us going forward, but is unable to stop, maintaining this speed and restraint, until the line is changed.” A huge revolution may seem to lead the world to progress in a linear way, but in fact, only rotates on a single line. Arena Tour – Machine is a miniature to represent human beings who consume their own image in the world that marches forward but perpetually gets back to the original place, accumulating only frictions, in this way.
The 20th century scholars and artists previously interpreted the perpetual movement and rotation described in Alfred Jarry’s novel as the anticipation of explosion caused by the idling and overload in capitalism. Recently, it seems to me more and more that we are standing in the age in which all of these results are shown on the surface. Seoul of 2016, where frustrations and expectations take turns repeatedly, indicates that the tragedy of history repeats itself in long and short cycles, just like fractals or revolving movement. In this world of an infinite loop, Arena Tour – Machine, the images of the audience, created by splendid lighting and permanent rotation, disappear as soon as they gather. Can those who are trapped before the camera and TV gain a certain awareness of reality? Can they dream of escape?
해리1), 예술가 되기(becoming artist)를 연습하다.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 Scene 1. 어떤 오해- 방&리의 작업은 어렵고, 불친절하다.
관객은 종종 방&리의 작업 앞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지 난감해 한다. 자연스레 작품이 어렵고 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사실이다. 방&리의 작업에는 현대사회는 물론 세계사에 대한 엄청난 레퍼런스들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소위 미디어아티스트이기에 꽤 복잡한 프로그래밍과 기술적인 언어들도 난무한다. 이 모든 것을 다 찾아보고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도 참아보겠다. 문학을 한 방자영 덕분인가. 그들의 작품에는 꽤 많은 은유와 수사들이 있다. 게다가 미디어아트라고는 하는데, 블링블링한 테크놀로지와 장비는 보이지 않고, 연극 무대의 한 부분이 전시장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제목에서 힌트를 얻을까 하면, 알고 있었다는 듯, 모호하게 빠져나간다. <Revision History X>, <Cul-de-sac>, <Elephant in the living room>, <FARM: Freindƨ & Twitterers>, <Bury your head in the sand like an ostrich>, 의미심장한 듯 보이는 이 제목들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 그들의 작업은 어렵다. 그리고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작품은 쉬워야 하는가? 친절해야 하나? 확실히 그들의 작업은 한눈에 읽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한 프로토콜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Scene2. 컬렉티브 그리고 협업의 함정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탔다. 언제풍랑을 만나 좌초할지 모르지만, 그 긴장감과 두려움이 공동 작업에 힘을 실어 주는 것 같다.” (방&리)
방&리는 방자영과 이윤준 2인으로 구성된 컬렉티브다. 방자영은 문학을 전공했고, 이윤준은 시각예술을 전공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했고, ZKM에서 활동한 덕택에 미디어아티스트라는 레이블이 그들에게 따라다닌다. 뉴미디어, 리서치, 디자인 등을 기반으로 작업하며,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설치는 물론 키네틱 라이트, 데이터 프로세싱,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작업으로 소화하고 있다. 확실히 혼자가 아니라서 가능한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의미의 풍성함이 그들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뿐만 아니다. 이미 듀오 컬렉티브인 그들 주변에는 많은 미디어아티스트 친구들이 있다.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필요할 때 적절히 모여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컬렉티브인 방&리는 임시적 컬렉티브를 구성하여 작업하면서 공연이나 무대연출과 같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을 모색하기도 한다. 확실히 컬렉티브이기에 가능한 작업들이 존재한다. 의견조율의 과정과 상호이해의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규모 있는 작업을 진행하기에 컬렉티브는 유용하다. 그러나 컬렉티브는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한시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믿음’과 ‘신뢰’는 생각보다 유약하다. 어렵게 만들어낸 성과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배신을 하고, 오해가 쌓여 등을 돌리기도 한다. 아무리 오래된 컬렉티브라고 하더라도 때론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깨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정은 생각보다 쉽게 금이 가기도 한다. 그들의 작업이 ‘우정’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Scene3. 우정에 관하여
“우정은 두 명 이상의 사람 사이의 협동 관계를 말할 때 쓰이는 용어이다.” (위키피디아)
아마도, 방&리의 작업에 그렇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우정’은 그들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즐겁고 신나게 아이디어를 공유했었을 테고,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문제를 풀어갔던 행복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언제나 해피엔딩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Friendship is Transparent>가 ‘Friendship is not transparent’으로도 읽히는 것은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짐작했듯이, 방&리에게 ‘우정’은 핵심키워드이다. 그러나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우정’이라는 보편적 감정의 근본을 짚어보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안에서 작동하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2012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있었던 <Nonzerosum Society>2) 전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 방&리는 광섬유 다발로 만들어진 <Friendship is Transparent>라는 작품과 더불어 전시장 입구에 <Friendship, 1945-> 이라는 묘비명을 설치했다. 1945년은 방&리의 작업에 주요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 쓰여진 해이기도 한데, 이 작품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을 바탕으로 하는 우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정의 죽음을 알리는 이 묘비명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전시에서 방&리는 ‘우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조명작업으로‘약속’이라는 단어도 등장시키는데, 우정과 약속이라는 것이 정치인들의 연설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방&리가 작업에서 말하는 ‘우정’이라는 것이 그저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일차원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정에 대한 다른 작업 중 <FRIENDSHIP IS UNIVERSAL>은 아주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이 작품은 디지털 폰트를 변형한 구조물 위에 설치한 조명 모듈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언뜻 보면 잘 감지되지는 않지만, 조명의 밝기와 깜박임 등은 다양한 전자 신호를 받아들여 움직임과 사운드, 데이터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라이트 설치작품이다. 방&리에게 우정이란 일종의 공통감정으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협동적 관계 형태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우정’의 개념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사회적 배경, 인종이나 개인의 관심사와 같은 차이를 넘어 사이버공간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 문장이 1980년대 초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국 TV 드라마인 <브이 V>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인들과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만들어 붙였던 포스터에 나오는 문장과 동일하다는 점은 오늘날 인터넷을 기반으로 문화나 국적,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남다르기도 하다.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 모두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오늘, 여기에서 ‘우정’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미니멀한 조명의 깜빡임은 ‘우정’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라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 Scene4.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투명한 사회라는 환상
얼마 전 구글 메일에서 알림메시지가 왔다. 무료사용 용량을 거의 다 사용했으니, 이제 유료로 전환해야 한다는 메일이었다. 유료전환을 하지 않으려면 메일박스를 정리해야 하는데, 수년간 써왔던 메일함을 정리한다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꼬박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대부분의 주요 첨부파일들은 저장했지만, 그렇다고 막상 메일박스의 메일을 지우려는 왠지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메일 계정을 유료로 전환했다. 구글은 나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 지인들의 연락처와 스케줄(구글 캘린더), 주요 서류(구글 드라이브), 심지어 여행가서의 내 방문지(구글 지도). 언제 어디서나 이 모든 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이 투명한 사회가 문득 무서워졌다.
방&리의 <Lost in Translation> 역시 유사한 경험에서 비롯된 작업이었다. 2012년 4월 구글 번역 API FAQ페이지에는 구글 번역 API 버전 1 서비스가 더 이상 제공되지 않으며, 버전2로 새로운 유료 서비스로 대체되었다는 공지3)가 떴다. 문제는 구글의 번역 API 버전1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트위터 계정을 통해서 몇몇 언어로 번역하여 피드했던 가변적 스크린플레이(Variable Screenplay)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영어로 생성된 대사들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트윗 되어야 했는데, 서비스 중단으로 인하여 원문 그대로 영어로만 피드 되고 있었다.
사실 구글이나 소셜미디어 회사들이 오픈소스로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하거나 유료로 전환하면서 발생하는 이러한 일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유료계정으로 전환했듯이 투덜거리면서 전환하거나 탈퇴한다. 하지만, 방&리는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작업화하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Lost in Translation>이다.
<Lost in Translation>은 번역 데이터가 처리되고 소비되는 과정을 피카사 API에 연동시킨 실시간 모자이크 영상과 구글 번역 API 를 사용하여 시각화했다. 그리고 오픈소스를 표방하여 한때 무료로 제공되었던 서비스가 유료로 전환되면서 번역과정에서 의미가 상실되는 지점과 그에 대한 비용지출에 대한부분들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FAQ>의 경우에는 이미지가 언어로 처리되거나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사용자들이 소셜미디어 상에 무심코 생성해내는 이미지들과 메시지가 만들어내는 비디오 모자이크 영상은 관객에게 일상에 침투해 있는 미디어의 위력, 프라이버시에 대한 이슈들을 생각하게 한다.
얼핏 단순하게 보이는 (때로는 별 의미 없이 보이기도 하는) 스크린상의 이러한 이미지들은 소유와 공유, 오픈소스, 집단 지성, 사생활보호권, 소비자의 권리, 지적재산권 등 오늘날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작동하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을 내포하고 있다. 방&리의 말처럼, 오늘날 다양한 소셜미디어 기반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많이 소통한다고 믿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저 흘려버리는 이 상황들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이러한 상황들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방&리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여전히 소통은 자유롭지(free) 않으며, 무료(free)가 아니다’
# Scene5. 거실/서재라는 무대와 모듈화된 작품들, 따로 또 같이
“우리 스스로 작업을 할 때, 진척이 있는지 자주 묻곤 한다. 소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데이터 비주얼리제이션을 통한 미학적 접근 방식을 한 예술이 때로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보일 때, 또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작업이 일종의 시위(demonstration)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이 질문은 아직 유효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집단(collective)의 이름으로 공유한 정보와 데이터들은 어떻게 처리되며 소비되는지 가끔 정책(policy)이 바뀔 때마다 개인정보와 공유의 수위를 다시 조정해야 할 때,“간편하고 손쉬운 사용자 환경”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현대인의 철학, 삶의 방식, 언어와 소통 방식까지 바꾸었을지 모르는 인터넷은 사회의 상호의존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방&리 작가노트에서)
현대미술에서 질문은 중요하다. 특히 민주주의와 투명성으로 위장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에서 현대예술은 (그리고 그것이 미디어아트라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사회가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파편화되어 있어 커다란 그림과 구조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세상이 변했기에 지금까지 해 왔듯 단일한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인 질문과 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잡해진 세상에 맞춰.
방&리의 작품들이 흥미로운 것은 변화하는 세상을 향해 부단히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만의 방식의 질문이기에 익숙해지기는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 그들은 하나의 작품에 하나의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Elephant in the living room>4), <Freindƨ in the living room>, <Transparent Study>과 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관객이 들어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놓고, 모듈화 된 작품을 이리저리 짜 맞추면서 다양한 질문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낸다.
먼저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은 거실이라는 무대에서 출발한다. 카펫과 의자, TV가 있는 여기는 거실이다. 거실로 설정된 공간은 ‘이미지의 장소이자 행위의 무대이다. 또한 반전의 공간이자 영화와 연극의 공간이며, 미디어라는 거울이 비추는 곳’이다. 거실은 토론의 역사에 등장하는 소품들을 변형 재구성한 모조품가구와 집기들, 조명과 TV 모니터, 비디오 카메라 등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거실에 놓여있는 코끼리 상(象)이라는 글자 조각은 수천 개 구멍과 연결된 광섬유 다발을 통해 프로젝션 되고 있는 모자이크 영상을 텍스트 메시지로 전달한다.
방&리는 이 작업이 이미지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정보화 시대는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본질적인 것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우리가 당면한 문제나 실체가 너무 크고 복잡하여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없다고 믿거나 없다고 믿는 척하는 모습을 변화하는 이미지와 이미지 대상 자체인 코끼리의 은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Freindƨ in the living room>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프린드(freind)’개념5)을 바탕으로 전개된 작업으로 현대예술은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정과 협업,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에는 모자이크 제너레이팅 영상과 연결된 광섬유 작업인 <Can’t take my eyes off you>와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유투브 사용자들이 올린 샘플들을 리믹스해서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이는 또 다시 라이트 작업과 연동되어 전시장을 채운다.
이 작업 역시 무대는 거실이다. 여기에서 친구들이 있는 ‘거실’이라는 공간은 사적인 공간을 넘어 소셜미디어와 개인, 거대기업과 클라이언트, 네트워크 사용자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을 재현한다. 방&리는 이렇게 조합된 거실을 통해 협업과 공존, 우정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이고, 어떻게 앞으로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토론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지금껏 무수히 많은 토론들이 있어으며, 그 토론들이 협력과 공존, 우정의 가치에 대해서 역설해왔지만, 여전히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토론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에둘러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깊이 있는 사고,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노트에서도 언급하듯, ‘작업을 통해서 대화할 수 있다면 – 그리고 거의 예술적 가치에 근접한 윤리적인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 토론의 과정 자체는 가치 있는 삶의 규율이 되어 법적, 사회적, 문화적 관습의 제약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Transparent Study>를 위해 설정된 무대는‘서재’이다. 서재의 중심에는 책장처럼 보이는 설치물이 있고, 여기에 그동안 예술에 대해서 리서치 했던 자료들과 그 과정에서 수집되었던 것들, 컬렉션, 레퍼런스 카드들이 있다. 네온라이트로 만든‘Friendship’이라는 단어도 보이고, 거리, 시간, 사색이라는 단어도 보인다. <Elephant in the living>에서 보았던 코끼리 상(象)도 있다. 영상과 모니터, 폐쇄회로 카메라도 있다. <Freindƨ in the living room>에서 보았던 염소 해리6)도 다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책장이라는 구조물은 중요하다. 일차적으로 책장은 도서관, 문명사회, 지식의 정보 등을 의미한다. 도서관이나 문명사회는 일반적으로 견고하고 거대한 건물로 상정한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의 도서관, 지식의 창고는 투명하다고 방&리는 생각한다. 때문에 책장은 공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벽이 되기도 하고, 문이 되기도 한다. 철재골조의 열린 구조로 만들어진 책장은 안과 밖을 연결하면서 단절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이미지를 반사하기도 하고, 투영하기도 한다.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투명한 공간으로 기능한다. 물론 투명하다는 것이 꼭 긍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서재란 원래 사적이고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내밀한 공간이다. 투명하다는 것은 모든 것들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투명성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사적인 공간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외부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빅 데이터로 대변되는 정보화 사회, 정보의 공개와 공유와 같은 문제들을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이나 <Transparent Study>와 같은 작품들은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에 대해 은유적으로 언급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이 이대로 괜찮은 것이냐고 관객에게 질문한다. 기존의 많은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정보화 사회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기술을 전면에 드러낸다던지, 아니면 사회고발형식의 액티비즘을 표방했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방&리의 작업은 상당히 은유적이고 간접적이고 개성있는 형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적인 면도 흥미롭지만, 여기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작품에 포함된 또 다른 작품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작품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 안에 다른 작품들과 다양한 작은 소품들이 마치 모듈화 되어 작동한다. 개별 작품으로도 기능하지만, 무대화된 설정공간에서 함께 작동하면서 메시지를 강력하게 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마치 단일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주처럼 개별 작품들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은 하나의 해석에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질문과 문제에 열려있다.
# Scene6. 어떤 오해에 대한 짧은 해명
확실히, 방&리의 작품들에는 세세하게 따져봐야 하는 레퍼런스들이 많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몇 시간째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다시 뒤적거리고, 희생양이 나오는 성경구절을 찾아봤는가 하면, 그들의 작업노트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했다. 작품 어디에서도 작가의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단서들만이 있을 뿐이다. 방&리의 작업이 어렵다는 오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방&리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작품에 있는 각각의 오브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부수적인 수고이자 부록 같은 즐거움이다. 오히려 세팅 안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는 것, 마련된 거실에 앉아 세심하게 준비된 디테일을 즐기는 것, 꾸며진 서재에 들어가 책장에 놓여 있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면 된다. 그들이 던져놓은 단어들을 연결 짓고, 느낌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방&리는 의외로 친절하게 많은 단서들을 던져 놓았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방식의 감상법이 낯설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하면, 방&리의 이야기는 명쾌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그런 경험을 닮아 있다.
# Scene7. 그래서,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는 예술가7)
적어도 현대사회에서의 예술가란 세상을 향해 적절하게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이고, 세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방&리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예술가이다.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보여주는 화려한 외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사회의 삐걱거림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대로 괜찮겠느냐고 질문한다.
방&리는 미디어아티스트이다. 때론 그들의 작품이 그저 쉽게 볼 수 있는 설치작품처럼 보이더라도, 그 이면에는 사운드와 라이트를 제어하는 첨단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들이 사용된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미디어아티스트라고 하는 아니다. 방&리는 일관되게 테크놀로지 기반의 사회가 작동하는 구조와 시스템,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불러오는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 작업해왔다. 미디어아트가 다양한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게 될 변화에 대해 질문하고 언급하는 것이라 할 때, 방&리는 확실히 미디어아티스트이다.
하지만, 방&리는 조금 다른 미디어아티스트다. 많은 예술가들이, 미디어아티스트들이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이들은 늘 과정 중에 있다. 개개의 작업들은 마치 커다란 무대 위의 소품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소품이라 하더라도 독자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만, 방&리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소품들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무대이고, 상황이다. 그것은 특정 멜로디에 대한 끊임없는 변주이다. 그래서 방&리의 작업은 늘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인 작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그들은 ‘예술가 되기’를 연습하는 예술가다. 서슴없이 과학자나 사업가들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즐거움에 설레기도 하면서 매 순간 ‘예술가 되기’를 하고 있다.
진행형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에 혹은 주어진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해야 하고, 시스템의 구조를 인지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예술가의 예민한 통찰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예민한 통찰 역시 진행형이다. 그것은 끊임없는‘예술가 되기’의 연습이다. 그 연습이 축적되면서 의미 있는 작업들이 생겨난다. 지금, 방&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1) <Freindƨ in the living room> 이후 방&리의 작업에는 종종 박제된 염소 해리가 등장한다. 해리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동시에,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등장하기도 하다. 해리라는 이름은 탈출마술의 대가로 유명했던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해리 후디니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미국인 마술사이자, 난국마술사, 스턴트 맨 배우, 연기자이다. 1926년 10월, 몬트리올 맥길대학교를 방문한 후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배를 얼마든지 때려도 끄덕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조슬린 고든 화이트헤드라는 학생의 펀치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사건 때문이었는지 그는 맹장괴저와 복막염으로 펀치를 맞은지 이틀 후인 10월31일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위키피디아)
2) ‘제로섬’은 1971년 Lester C Thurow의 <제로섬 사회 The Zero-Sum Society>가 발간되면서 유명해진 용어로 게임이론이나 경제학 분야에서 주로 쓰인다. 제로섬은 승자의 득점과 패자의 실점을 합치면 반드시 ‘0’이 된다는 논리로,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넌 제로-섬 Non Zero-Sum’이라 한다. ‘넌제로섬’ 경우 합계가 0이 아닌 경우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참가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윈윈’의 가능성도 있다. 물론 반대로 모두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방&리는 이 전시에서 우정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윈윈’의 가능하에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넌제로섬의 사회’가 언제나 낭만적인 장밋빛만은 아닐 것이고, 쉽게 도래하지도 않을 것임에 대해서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3) “Google Translate API v1 is no longer available as of December 1, 2011 and has been replaced by Google Translate API v2. Google Translate API v1 was officially deprecated on May 26, 2011. The decision to deprecate the API and replace it with the paid service was made due to the substantial economic burden caused by extensive abuse.” (excerpt from Translate API FAQ, https://developers.google.com/translate/v2/faq, Last updated April 20, 2012.)
4) ‘방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이 있다.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코끼리를 방안에서 빼내야 하기는 하는데, 덩치도 크고 힘도 쎈 이 녀석을 빼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하고 넘어가자니 찜찜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뭔가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문제지만, 선뜻 나서기는 곤란하여 모르는 척 하는 민감한 사안을 ‘방안의 코끼리’라고 말한다.
5) 소설에서 동물들이 인간의 언어를 배울 때, 영어의 “friend”를 i 와 e 의 자리를 바꿔 쓰고 7 계명 중 어떤 S 하나를 거꾸로 뒤집어쓰면서 철자 오류를 범하는 에피소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6) 해리는 <Freindƨ in the living room> 이후부터 방&리의 설치작업에 종종 등장한다. 해리라는 이름은 탈출마술의 대가였던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해리 후디니는 종종 escape artist라고 불렸는데, 방&리는 여기에서 scapegoat, 즉 희생양(원어를 직역하면 희생염소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관례적으로 양이라 부르기 때문에 scapegoat는 희생양으로 번역했다.)의 개념을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희생양이라고 하면 순결한 양/염소을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방&리가 참조하는 양은 때묻은 양/염소의 개념이다. 성경에 의하면 레위기 16:7-10에는 두 마리의 양/염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하나님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아사셀을 위해 뽑은 염소는 광야로 내몰려져 하이에나와 같은 들짐승에게 희생된다. 방&리는 이 희생양, 광야로 내몰리는 때묻은 양/염소를 자신들(예술가)의 메타포로도 사용한다고 말한다.
7) “역사의 기관차, 혁명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바퀴는 정교한 장치로 맞물려 있고 무수한 톱니(gear)들과서로 엮여 있다. 발전기(generator)와 전동기(motor)는 속도를 내면서 바퀴를 굴린다. 어느 순간 계속 회전하며 전진하는 힘은 우리를 앞으로 가게 하지만 노선이 변경되기 전까지 이 속도와 굴레 안에서 정지하지 못한다. ‘프로덕션’이라는 프레임에서 이 기관차는 그런 운명을 맞이하도록 설계되었다. 우리도 역시 프로덕션이라는 산물의 일부여서 스스로 나사(screw)를 조이며 예술가 되기(becoming-artist)를 연습(practice)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예술가 만들기(making-artist)를 하는 곳에서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 변화를 꿈꾸고 있다.” (<깊은 한숨, TV에 나오지 않는, 바퀴 달린 혁명> 작가노트에서 인용)
*Brilliant Critics 발췌
Harry,1 Practice “Becoming-Artist”
SHIN Boseul, Curator in Chief, Total Museum
# Scene 1. A Misunderstanding: Bang & Lee’s Work Is Difficult and Unfriendly
Viewers of Bang & Lee’s work sometimes feel helpless, unsure of what to look at or what message to read. They naturally complain that the work is difficult, and that they do not know what it is. They are correct. Bang & Lee’s works contain a huge number of cultural references, not just from contemporary society, but also from world history; and that is not all. As so-called “media artists,” the work they create is rife with complex programming and technical language. Uncovering all of these things and fully understanding the work is (almost) impossible. Could this complexity be due to Bang’s interest in literature? Their works contain many metaphors and investigations. Furthermore, there is a sense that the technology and equipment behind their new media works are not fully shown, and that only one part of their theatrical stage is on display in their exhibitions. Trying to get any clues from their artwork titles, as one might assume, only leaves us in vague territory. Revision History X, Cul-de-sac, Elephant in the living room, Farm: Freindƨ & Twitterers, Bury Your Head in the Sand Like an Ostrich: these apparently significant titles do not seem to help much in understanding the individual works. Admittedly, their work is difficult, and it is not friendly for the causal viewer. But now I must ask: Does a work of art have to be easily comprehensible? Does it have to be friendly? Their work certainly cannot be read entirely at a single glance. But can we then say that their work is difficult? Or are we, perhaps, just missing the protocol for reading their work?
# Scene 2. The Trap of Collaboration and the Collective
“We have already taken a boat. We don’t know when we will meet a storm and become shipwrecked, but that tension and fear empowers our collective work.”
— Bang & Lee
Bang & Lee is a two-person collective consisting of Bang Jayoung and Lee Yunjun. Bang studied French literature in Korea, as well as art theory in her native country and France, and also communication design in Germany. Similarly, Lee studied painting in Korea, applied arts in France and media art in Germany. Due to their projects with ZKM (Zentrum für Kunst und Medien) in Karlsruhe, a German cultural institution that focuses on cultivating new media, the duo is associated with the label “media art.” Their work — based in new media, research and design — takes on various forms that include not just interactive media-art installations, but also kinetic lights, data processing and video mosaics. Their collaborative work contains abundant and varied formal experiments and meaning. This two-person collective, furthermore, has many collaborative peers who are also media artists. When they need “friends” with a variety of knowledge and techniques, they gather and create works together. Occasionally, Bang & Lee will temporary expand their collective, seeking to venture into new areas, including performances and stage productions. There certainly are works that are only possible to be realized by collectives. While mutual understanding and a process for coordinating various opinions are necessary, collectives are effective for executing works of significant scale. However, since the existence of collectives depends on faith and trust, there is an underlying premise that failure to uphold these two elements can lead to disbandment at any time. After all, promises of faith and trust that appear unwavering could be more vulnerable than one expects. Before completing a painstakingly created project, some collaborators may defect, for whatever reason, which would then lead to the accumulation of unfortunate misunderstandings. No matter how long a collective has existed, they sometimes end up disbanding in absurd ways. Camaraderie is more easily broken than we think; which is why collectives have good reason to emphasize “friendship” in their works.
# Scene 3. On Friendship
“Friendship refers to a collaborative relationship between two or more people.”
— Wikipedia
The “friendship” that appears so often in Bang & Lee’s work seems to have developed out of their own experience. They have fond memories of the times they have excitedly shared their ideas with one another and how, in the face of unpredicted difficulties, they put their heads together and solved those problems. However, it is not too difficult to presume that this process did not always ended happily. Is it excessively empathetic, then, to read one of their light installations, titled Friendship Is Transparent (2012), as ironically suggesting that friendship is, in fact, not transparent?
As one may have guessed, “friendship” is an important keyword for Bang & Lee; but it does not simply refer to personal relationships. Their 2012 exhibition, “Nonzerosum Society,”2 held at Insa Art Space in Seoul, showed this well. For this exhibition, Bang & Lee showed Friendship Is Transparent, made from optical fiber, together with Friendship, 1945, an epitaph installed at the exhibition entrance. The year 1945 was when George Orwell wrote the novel Animal Farm, which is a major point of reference for Bang & Lee’s oeuvre; the epitaph at Insa, which announced the death of “friendship,” was inspired by the book — a dystopian allegory that satirizes the rise and fall of the Russian Revolution, whose communist ideology was ultimately corrupted by Joseph Stalin. In “Nonzerosum Society,” Bang & Lee featured the word “promise” together with “friendship” through their works, perhaps also alluding to how often (and wantonly) politicians use the terms “friendship” and “promise” in their stump speeches. It is clear that the kind of “friendship” Bang & Lee reference in their work does not have just a one-dimensional meaning.
Another of their works based on the notion of friendship, Friendship Is Universal (2013), is simple yet powerful. The work is an interactive light installation in the shape of digital text that spells out the title phrase. Though not immediately obvious, the light’s brightness and patterns are controlled by electronic signals that continuously respond to environmental movement, sound and data. Bang & Lee see friendship as a common feeling among people that leads to a cooperative relationship founded on mutual trust. Today, the concept of “friendship” also extends beyond physical space, social background and even the specific interests of an individual or race, and expands infinitely within cyberspace. The title of Friendship Is Universal references a phrase that appeared on a series of propaganda posters in the popular 1980s American television drama, V; these posters were put up by aliens in an attempt to promote an alliance with the citizens of Earth. “Friendship is universal” is an uncommonly expressed sentiment in the present day, despite the rise of networks on the internet aimed at overcoming separations of culture, nation and distance. What does “friendship” mean for our time, in which threats of terror and war are unending, and everyone is virtually connected within a “global village”? In Bang & Lee’s installation, a minimal flashing of its lights seems to warn us to further contemplate the concept of friendship, and to analyze the state of our world more thoroughly.
# Scene 4. The Illusion That a Society Based on Technology Is a Transparent Society
Some time ago, I got a notification in my Gmail account. It said that I had used almost all of my free storage, and that I now needed to convert to a paid account to gain more space. In order to avoid converting to a paid account, I had to organize my mailbox by sorting through years of accumulated mail, which was a laborious task. It seemed like it would take entire days. I first started by saving most of the important files that I found attached to email messages; but for some reason, the idea of actually erasing my mail left me anxious. In the end, I gave up, and converted to a paid account. This led me to contemplate the fact that Google has all of my personal information, including my acquaintances’ contact details, my schedule (Google Calendar), important documents (Google Drive) and even records of the places I have visited on vacation (Google Maps). I suddenly became afraid of this transparent society, in which we can access these things anywhere, at any time.
Bang & Lee’s project Lost in Translation (2012) is based on a similar experience. It’s a generative, network server–based data processor that utilizes the Google Translate API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v2, to demonstrate the mechanics of how a machine learns new information in real time and in space. Through it, a screenplay, written in English, is translated into several different languages and posted live on Twitter,). In April 2012, there was an announcement on the Google Translate API FAQ page stating that version 1 of the Google Translate API, with which Lost in Translation was originally made, was no longer being offered, and would be replaced by a second, paid version.3 This led to the installation’s Twitter account to no longer function as intended. Due to the halt of the older Google Translate service, the screenplay’s original lines were left in the Twitter feed in English. In reality, Google and other social media companies ending services that had once been offered as open-source, or converting them to paid services, is nothing new. Most people will, as did I with my Gmail account, begrudgingly convert or quit the service. Bang & Lee, however, actively reacted to this phenomenon and transformed it into a work of art.
Lost in Translation took the process of handling and consuming translated data, and combined it with the APIs of Picasa (Google’s image-organizing service, now Google Photo) and Google Translate, visualizing them as a real-time video mosaic. The work visually represents the loss of meaning in the process of translation, which is presented as being parallel to when a service, once claiming to be open-source, changes from free to paid. A related work, FAQ (2012), shows the act of processing images as (or converting them into) language. It is a video mosaic, made from images and messages that online users uploaded to social media, which makes one contemplate issues of privacy and the power of the media that has penetrated into our daily lives.
In FAQ, images on the screen, which at a glance appear simple (and sometimes lacking any particular meaning), connote a variety of issues produced by today’s society that are rooted in technology: ownership and sharing; open-source services; collective intelligence; the right to privacy; the power of consumers; and intellectual property. As Bang & Lee have said, people in today’s social media–dominated world believe that they are able to communicate freely and multifariously. Through their work, the duo critiques this mentality, which is ever so casually regarded as “truth” by many people, and in what ways it may be wrong. Unlike what many assume, in the words of the artists, “communication is neither free [as a personal liberty] nor free [in terms of money].”
# Scene 5. Living Room/Study and Modular Works, Separate and Together
“When we make works of art, we often ask if they are progressing. With the advent of social media, art that takes aesthetic approaches to data visualization sometimes appears to lose meaning, and art that uses social media as a form of protest doesn’t appear to reflect reality. In these cases, this question [regarding progression] is still valid. We cannot pose questions more fundamental than that. Whenever the the privacy policy and terms of service surrounding the information and data we produce as a collective is changed, or when we have to readjust our personal information and the degree to which we share it, we wonder: what is universally accessible and useful user environment? The internet which may have changed the modern humans’ philosophy regarding ways of life, language and communication — has made the interdependencies of society even more complex.”
— From the artist note of Bang & Lee
Questions are important in contemporary art. In particular, in a technological society that disguises itself behind a facade of democracy and transparency, contemporary art (specifically media art) must be able to question. Questions are even more important when society is fragmented into countless pieces, and when it is difficult to grasp its larger picture or structure. But these questions must constantly evolve their methods, because it is difficult to arrive at the heart of today’s problems using the logic of yore. Questions and answers must be sought out simultaneously, on a variety of levels, and in tune with the complicated modern times. Bang & Lee’s work is interesting in its steady questioning of our changing world. Of course, since the artists have a particular method of questioning, it takes us, as viewers of their work, some time to adjust to it. In each work, they do not simply focus on a single message. For projects such as Elephant in the living room (2013),4 Freindƨ in the living room (2012) and Transparent Study (2014), Bang & Lee created a physical stage that the viewer could enter and inhabit, and where modular works spot the space, which poses a variety of different questions simultaneously.
Elephant in the living room features a stage set up like a living room, complete with a carpet, chairs and a television. It is, in their words, “a place of images and a stage for action. It is also an inverted space, a space for movies and plays, a place for the reflections of media’s mirror.” It is decorated with lights, television monitors, video cameras, replica furniture and other paraphernalia that reference famous political debates throughout history. A montage of YouTube videos, featuring enticing speeches, debates and cinematic conversations, is projected onto a surface riddled with thousands of tiny holes, which is connected to a sculpture of the Chinese character for elephant (象) through various fiber optic cables.
Bang & Lee explain that this work was inspired by the “life and death of images.” In today’s Information Age, we can access everything; yet paradoxically, in many cases, we cannot “arrive” at anything. It is as if — seeing that the problems and reality we face are too big and complex to grasp — we believe (or pretend to believe) that those problems do not exist as our own. They are instead represented through ever-changing images and in symbolic form: the Chinese character for “elephant” is also the one used for the word “image,” which literally suggests the metaphor of “the elephant in the room.”
Freindƨ in the living room — based on the misspelled word “freind”5 that appears as a key element in George Orwell’s dystopian allegory Animal Farm — tells of friendship, collaboration and coexistence, which are considered important states of being, in not just contemporary art but in modern-day society. Another set of Bang & Lee’s work that comprises video-mosaic-generated lm and fiber optics is Can’t take my eyes off you and You we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both 2012), which remix footage uploaded by YouTube users in real time, and transforms them into a projection and light installation that fills the surrounding space.
The stage for Freindƨ is, again, a living-room-like setting. The space, however, goes beyond the kind of private atmosphere of an intimate living room inhabited by one’s close friends, acting instead as a setting that brings to mind more superficial relationships, such as between individuals and their social media peers, large corporations and clients, or users of communal networks. Through this living room setting, Bang & Lee urge viewers to discuss the limits of collaboration, coexistence and friendship, but, simultaneously, how these relationships could still be carried forward despite such caveats. Incidentally, there have been countless similar discussions throughout history and — while they have often been paradoxical in their treatment of collaboration, coexistence and friendship — I believe discussions of such issues have always been important. The critical thing about having a discussion is not arriving at a fixed answer, but that, through its indirect process, one obtains deeper thought and directionality. As Bang & Lee have referred to in their production notes, “If one can have a dialogue through art — and if an ethical life that approaches artistic value can open up the possibility of enriching all of our lives — the process of discussion itself can become a standard for a life of value, and embrace the restrictions of legal, social and cultural customs.”
With the work Transparent Study, the stage is, appropriately, a study room. At the center of this room is an installation that looks like a bookcase full of various materials, collections and reference cards that the artists accumulated while researching for their art. We also see words spelled out in neon lights: “friendship,” “distance,” “time” and “thought.” The Chinese character for “elephant” that we saw in Elephant in the living room is also featured on a mirrored panel, which is accompanied by videos, monitors and closed-circuit cameras. A goat named Harry,6 who also appears in Freindƨ in the living room, is featured here as well.
The structure of the bookcase is important in this work. Bookcases not only indicate materials of knowledge, but also recall libraries and civilized society. The latter two are ordinarily represented by large, sturdy buildings. Bang & Lee, however, think that libraries and other repository of knowledge in today’s Information Age are more “transparent” entities. As such, the bookcase in Transparent Study takes on different appearances depending on the space in which it is exhibited, and can even serve as a wall or a door. With its open, steel frame, the bookcase connects and separates the outside and inside of the installation, reflects images from the video screens and is projected. It functions as a space that simultaneously is and is not transparent. And, of course, transparency does not always have a positive connotation. A study is traditionally an intimate space, where one can express and show one’s tastes in a private manner; but to practice transparency means to reveal everything. As such, a society that demands transparency is one that would expose an individual’s private space to the outside world, whether or not we want to do so. Here, we must again confront a digital society represented by big data, as well as the problems of publicizing and sharing personal information.
In this way, works such as Elephant in the living room and Transparent Study approach a society rooted in technology in metaphorical terms, asking viewers if they are okay with the state of the world in which they live today. If many existing works of media art foreground technology or make claims of social activism through the process of critiquing information society, we can say that Bang & Lee’s work similarly approaches these subjects in metaphorical, indirect and distinct ways. The content of their work is interesting, but such an observation alone overlooks the function of the different elements contained within their art. In order to tell a single story, their works contain various components and minute details that act in a modular fashion. Each piece functions as independent works, but within the realm of collectively staged installations, they work together to emphasize their messages and develop their voice. Acting as diverse variations on a single theme, Bang & Lee’s works cannot be pinned down by a single interpretation; they serve to open up new questions and problems.
# Scene 6. A Short Explanation of a Misunderstanding
There are certainly many literary references made in Bang & Lee’s work. I had to reread the artists’ notes several times, as well as revisit George Orwell’s Animal Farm and biblical passages on the sacrificial lamb. The artists’ intentions are not clearly explained anywhere in their work, and there are only hints of what they are. The misunderstanding that Bang & Lee’s work is “difficult” comes from this aspect of their practice. However, in order to appreciate Bang & Lee’s art, there is no need to laboriously uncover what each individual object in their work means. This task is secondary to viewing the work and only provides supplementary enjoyment. It is enough to enter and become the protagonists of their artwork — to sit in the living rooms they have prepared and enjoy their details, and to enter their decorated study and consider the objects on the bookcase. It is more important to connect the words the artists use in the works and to contemplate our responsive feelings. Bang & Lee, in fact, include many clues in their work in unexpected ways. Yet we feel that their work is difficult, because this method of appreciating art is unfamiliar to us. Once we become familiar with it, Bang & Lee’s stories start to unfold more clearly. While they may not be able to be fully explained with words, they often resemble experiences with which we are familiar.
# Scene 7. Artists Who Practice “Becoming- Artists”7
An artist in contemporary society, at the very least, knows how to ask appropriate questions of the world. By asking questions, an artist approaches the essence of things and observes the world with sharp eyes. In this respect, Bang & Lee are artists of keen observational power. They pay attention to the cracks in society that are hidden by its polished, modern and ever-changing surface, and question whether things are okay as they are. Bang & Lee are media artists. Even when their works sometimes appear to just be simple installations, the two use a variety of cutting- edge technologies in them, such as ones that control light and sound, among other things.
But they are not considered media artists just because of the technology they incorporate. They have consistently produced work regarding the structures and systems of our technology-based society and the kind of changes they bring about in this world. “Media art” is not just about using a variety of technology; it also refers to and questions the changes that these things produce. In this sense, Bang & Lee are certainly media artists. However, they are somewhat unique media artists. While many artists have the goal of producing finished works, Bang & Lee are always immersed in the process. Each of their works also resembles props on a large stage. Though these things naturally have value as individual works of art, the important thing in Bang & Lee’s practice is how the individual elements serve to create a stage and setting. Their works are like endless variations of a specific melody. Their pieces, thus, always in progress. Always creating works that are in progress, Bang & Lee are artists who “practice becoming-artists,” a reference to the ideas of French philosopher Gilles Deleuze. Often collaborating with practitioners from different fields, such as scientists and businessmen, the artists fail in some instances, but in others experience the enjoyment of creating something new. All the while, they are in the constant process of “becoming-artists.”
Creating a work about process is different from making a painting or a sculpture. For the former, one must know how to react sensitively to the world and its current situations, maintaining a critical eye and recognizing the structures of its systems. Especially in times such as our own, where things are changing rapidly with tremendous developments in technology, an artist’s sensitive insight is more important than ever. This kind of sensitive insight comes in the form of process; it is part of the endless practice of “becoming an artist.” As that practice builds up, meaningful works are produced — as is the case for Bang & Lee.
1. Since Freindƨ in the living room, a taxidermy goat referred to as “Harry” has occasionally appeared in Bang & Lee’s work. Harry represents both the sacrificial lamb and the artists’ own personas. Harry’s name comes from the master escape artist, Harry Houdini (1874–1926). Houdini was an American magician born in Budapest, Hungary, and was also a stuntman and an actor. In October 1926, when visiting Montreal’s McGill University, he boasted of his strength by guaranteeing that no matter how hard he was hit in the abdomen, he would not budge. However, when punched by the student Jocelyn Gordon Whitehead, Houdini fell over. While it is unclear if this incident was the cause, Houdini died two days later of appendicitis and peritonitis. He was 52 years old. (“Harry Houdini,”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ccessed November 9, 2016 (en.wikipedia.org/wiki/Harry_Houdini).
2. “Zero Sum” is a noted term adopted from Lester C. Thurow’s book The Zero-Sum Society (1980), which is often used as reference in the areas
of game theory and economics. “Zero sum” describes the logic wherein the winner’s points earned and the loser’s points lost always add up to 0. In a “non-zero sum” situation, it is possible for the combined points to add up to something other
than 0. For example, a “win-win,” in which all participants gain something, is possible. Of course, the opposite case, in which all participants experience a loss, is also possible. In this exhibition, Bang & Lee explored the possibility of a society based on friendship that would be a win-win situation for everyone involved. However, there is also an implicit allusion that such a romantic and rose-tinted “non-zero-sum society” may not happen.
3. “Google Translate API v1 is no longer available as of December 1, 2011 and has been replaced by Google Translate API v2. Google Translate API v1 was of officially deprecated on May 26, 2011. The decision to deprecate the API and replace it with the paid service was made due to the substantial economic burden caused by extensive abuse.” (Excerpt from Google Translate API FAQ, cloud.google.com/translate/v2/faq, last up-dated April 20, 2012.)
4. In the English lexicon, there is an idiomatic expression that involves saying that there is an “elephant in the room.” For an elephant to be in a human-sized room — it must be stressful to the animal. But to get it out of the room, with its huge body and great strength, is not easy. So it is quite possible that whoever is in that room would instead resort to awkwardly pretending that the elephant is not there, as trying to resolve the situation would only make things more complicated. This kind of sensitive situation, in which there is a problem that everyone is aware of but pretends not to notice, is referred to as an “elephant in the room.”
5. This is taken from an episode in the novel, when a group of farm animals, the protagonists of the story, banish their farmer from his property,
and subsequently adopt the human language to create a manifesto for their new life. In the process of writing their “Seven Commandments of Animalism,” they mix up the “i” and the “e” in the word “friend,” and write the letter “s” backwards in one instance.
6. Though Harry’s name comes from Harry Houdini, it is only loosely associated with the eponymous escape artist. Bang & Lee took from Houdini’s tricks the concept of the scapegoat or sacrificial lamb. (“Scapegoat” is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 original Hebrew word; but in Korea, the word for “goat” literally means “mountain lamb” — so in the Korean language, the term “scapegoat” is expressed as “sacrificial lamb.”) While in some religious traditions, the “sacrificial lamb” is thought of as a virginal lamb or a goat, the animal that Bang & Lee reference in their work is the concept of a filthy lamb or goat. The Bible’s Leviticus 16:7–10 tells a story of two goats: “Then he shall take the two goats and set them before the Lord at the entrance of the tent of meeting. And Aaron shall cast lots over the two goats, one lot for the Lord and the other lot for Azazel. And Aaron shall present the goat on which the lot fell for the Lord and use it as a sin offering, but the goat on which the lot fell for Azazel shall be presented alive before the Lord to make atonement over it, that it may be sent away into the wilderness to Azazel.” The goat chosen for Azazel is sent into the wilderness, where it is sacrificed to the hyenas and other wild animals. In a similar way, Bang & Lee believe that Houdini made a sacrifice of himself in his escape performances. With well-planned tricks such as his, one could dramatically transform oneself from a non-artist to an artist. But, such tricks could unfold in uncertain directions, where one could escape with success or fail miserably and, ultimately, we don’t know whether we will become scapegoat or sacrificial lamb.
7. This subheading is in reference to the concept of “becoming-artists,” which is further explored by Bang & Lee in their work, (deep sighs) untelevised, revolution on wheels (2015). In describing the work, the artists state: “The word ‘revolution,’ from the Latin words ‘re-’ and ‘volvere,’ means ‘a turning around’ or ‘rotating in a circular course’ and back to a starting point. Revolution[s], as ‘the locomotives of history,’ are on wheels, so to speak. These wheels are interlinked with numerous gears, while being connected to one another through a sophisticated device. Generators and motors roll their wheels in high speed. The forward- moving power, generated through constant rotations, makes us advance, but we cannot stop at this speed until the route changes. In the frame of ‘production,’ this locomotive was designed to be destined that way. We are also a part of the output of the production, so we are practicing ‘becoming-artist[s]’ by tightening the screws ourselves. We dream of changes that have not come yet.”
*Extract from Brilliant Critics
방&리 :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들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그리고 공동체와 국가 간 경계들 안팎의 상호의존적 네트워크가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넌-제로섬’ 해결방식에서 찾으려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즉, 이익-손해 방식 대신 이익-이익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호의존성이 전체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과업을 더 잘해낸다면 우리들도 더 잘하려고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며 서로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 빌 클린턴, 와이어드(Wired) 지 인터뷰, 2000년 12월i)
방&리는 기술-편재적 세계의 쟁점들을 작업의 내용으로 다룬다. 초국가적 주체들이 지배하는 망-기반의 협동사회; 비-가시성과 유사-가시성으로 표면을 패턴화한 정보 및 데이터 기반의 세계 지각; 협력을 전제로 분산 및 공유 시스템을 지향하는 대안적 민주주의; 극단적 기술기반 비전에 입각한 목적론적 과학사관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세계를 규정짓는 이 수많은 패러다임의 레이어들은 불과 지난 십여 년간 구체화된 것들이다. 소위 ‘미디어아트’ 혹은 ‘뉴 미디어아트’라고 불려 온 ‘기술기반 예술’은 이제 ‘기술편재 사회’로 접어들면서 예술적 장르로서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상실하는 대신 더욱 광범위한 창조적 생산의 범주로 전환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뉴 미디어아트’라고 부르는 장르들은 아예 ‘동시대 창조’와 같은 보다 보편적인 명칭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 분야의 예술적 접근이 더 이상 프로그래밍과 장치의 결합과 같은 기술-관습적 실천만으로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방&리는 미술과 철학, 연극과 테크놀러지의 경계들을 따라가면서 작업해왔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포획해 나가는 야심 찬 테마들은 한국의 미디어아트 뿐 아니라 동시대 미술 지도 전반에서 중요하지만 매우 희소한 비평적 지점들로 다루어질 것이다.
프로토콜
방&리가 일차적으로 현재의 세계에서 추출해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이다. 관습적으로는 그것을 자본이나 계급투쟁, 혹은 제국이나 포스트-포스트 식민주의 등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평행이론을 거론해야 할지도 모른다. 매번 새롭게 수많은 플랫폼들로 확장, 복제되는 초-국가적 기술-정치-산업 복합체들과 개개인의 참여가 극도로 강조되는 통신기술 기반의 초-다원 민주주의 사회에서 장래의 우리의 운명을 가시화할 수 있는 일관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협력과 토론, 조직과 분배의 사회적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규범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까? 우리는 유토피아를 너무 일찍 금기들과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유토피아는 끊임없이 지연되고 보류되어 왔을 뿐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세계의 접점들을 따라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방&리의 작품들을 가로지르는 규칙들은 세 개의 키워드 즉, 넌-제로섬, 거실, 그리고 우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애초에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넌-제로섬
로버트 라이트 Robert Wright는 2000년에 저술한 ‘넌제로 : 인류 운명의 논리학 Nonzero: The Logic of Human Destiny’에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보가 무엇보다도 ‘넌-제로섬’ 원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게임 이론(Game Theory)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제로섬(Zero-Sum)이란 한정된 자원에 대해 누군가가 이익을 취하면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는 손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를 가리킨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주인공인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John Forbes Nash Jr.)는 ‘내쉬 평형이론(Nash Equilibrium)’에서 서로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고려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경쟁자들이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힘의 평형이 이루어진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경쟁적 상황이 아닌, 누구도 손실을 보지 않고 공동으로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모두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을 넌-제로섬(Non-Zero-Sum)이라고 부른다.ii) 협업을 전제로 하는 방&리의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 협력과 토론은 이들의 작업 모두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방&리의 작업들이 모두 혼합(composite)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부분들이 모두 상이한 경로들을 통해 주어진 공간에 병렬적으로 도착하거나 이를 통해, 마치 ‘카페트의 그림’처럼,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가장 적정한 넌-제로섬 체제다. 특정한 지점의 충만함이 다른 지점의 결여를 초래하지 않는다. 각각의 참가자들은 모두 예술에 다양한 경로로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세계’로 확대해서 보면, 갈등이나 부정은 선의의 ‘토론’과 ‘타협’을 통해 상이한 이득들로 변환되어 당사자들에게 재분배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관념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러한 이상적 토론의 장소는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 방&리는 그것을 ‘거실’이라고 부른다.
거실 : 파견된 무대 / Living Room : Dispatched Stage
다소 연극적인 톤으로 말해보자 : 여기에 거실이 있다. 이 거실은 사실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차원으로부터 이 장소에 투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실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차원으로부터 이곳에 파견된 무대에 가깝다. 무대 위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두 개의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이 무대들 위로 카메라와 조명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의자는 곧 일어날 토론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전시들을 통해 방&리는 거실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거실을 “이미지의 장소, 행위의 무대, 반전의 공간이며, 동시에 영화와 연극의 공간, 삶이라는 무대, 그리고 미디어라는 거울이 비추는 곳”이라고 말한다. 거실은 사적 자율과 공적 규율이 중첩하는 장소다. 이곳에서는 정치와 거래, 사적 교유와 가족들의 일상이 교차한다. 거실은 내부이자 외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포획된 바깥’ 혹은 ‘바깥을 반복하는 내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거대한 덫, 깊은 자루, 정교하게 세팅된 장치이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유지하는 기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마치 마그리트의 <듣는 방 La Chambre d’Écoute >에 등장하는 사과처럼, 코끼리 한 마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코끼리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소파에 누인 몸을 낮게 낮추고 거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의 공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부로 들어온 바깥 : 거실의 인간들은 주체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로 이 사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해 토론한다. 코끼리는 그것의 크기와 무게로 인해 어느 순간 가시적 경계를 벗어난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것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으며, 우리의 시선을 파편화한다. 거실의 모든 이들은 이미 내부를 가득 채운 바깥을, 내부가 소멸된 바깥을 향해 앉아 있다. 이 코끼리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는 등장하지 않는 동물이다. 그것은 ‘친구’ (혹은 ‘동무’)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동물이며 ‘우정’의 범위를 벗어난 장소에서 난입한 존재다. ‘우정’으로 포획할 수 없는 과도한 대상이자, 평등하게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시선을 초과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목적론적(teleonomic)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실’은 이미 미래와 과거의 어딘가에 실현되어 있다. ‘거실’은 미증유의 유토피아적 공동체로부터 현재로 투사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엿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거실에서 코끼리를 내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스스로 완벽한 코끼리가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코끼리를 우리의 친구로 길들이는 것일까?
우정 : 막다른 골목 / Friendship : Cul de sac
방&리의 <Cul de sac>은 외부의 음향에 대응하는 인터랙티브 조명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긴 백색의 조명관들로 구성된 작품은 ‘Cul-de-sac’ 즉, ‘막다른 골목’ 혹은 ‘건배’라는 의미의 단어를 표시한다. ‘Cul-de-sac’은 직역하면 자루(sac)의 엉덩이(cul) 혹은 맨 밑바닥을 의미한다. 입구와 반대쪽에 있는 내부의 맨 끝 부분인 셈이다. 어떻게 해석하면 마지막으로 남겨진 사적 내부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외부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토론의 한계점이며 동시에 ‘우정’이 봉착한 최소한의 공유지가 될 수 도 있다. ‘자루’는 형태상 함입(invagination)의 벡터로 이루어져 있다. ‘Cul-de-sac’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성적인 의미 못지않게 내부의 생산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내부의 맨 끝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 그것을 가시화하고 앞으로 끌어내는 것이 방&리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방&리의 또 다른 조명 설치작업 <우정은 보편적인 것 Friendship is Universal>은 앞의 작품 <Cul de sac>과 반향을 일으키는 관계에 놓여 있다. 우정은 내부와 내부의 결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정을 통해 우리는 불가능한 존재의 가능성을 각자에게 분배한다. 블랑쇼는 우정의 최종적인 형태를 임종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적 순간을 함께 경험하는 이 불가능한 분배의 행위야말로
‘공동체’의 마지막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iii) 공동체주의의 실패는 이 최종적 공동체를 계량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측정할 수 없는 것, 데이터베이스를 넘어서는 것,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멸하는 대상의 옆에서 그것의 소멸을 바라보는 것뿐일 것이다.
방&리의 작업은 기술편재 사회에서, 자본-제국의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우정과 친구의 네트워크 속에서, 연출된 토론의 확장된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자유가 남아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뉴미디어를 넘어, 새로운 유형의 극적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시나리오는 세계의 극단적 추상성으로부터 토론의 자리로, 우정에 기반한 넌-제로섬의 협력으로의 전환을 실현시킬 구체적 해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도달하지 않고 있는 것들의 호출을 위한,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세계의 그림을 가시화하기 위한, 우정과 협력의 조건들을 예측하기 위한 글쓰기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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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e more complex societies get and the more complex the networks of interdependence within and beyond community and national borders get, the more people are forced in their own interests to find non–zero-sum solutions. That is, win-win solutions instead of win-lose solutions…. Because we find as our interdependence increases that, on the whole, we do better when other people do better as well — so we have to find ways that we can all win, we have to accommodate each other…
— Bill Clinton, Wired interview, December 2000
ii) 예컨대, ‘수감자들의 딜레마 (Prisoner’s Dilemma)’는 범행을 함께 저지른 공범을 따로 신문할 때 각각의 용의자들이 죄를 자백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형량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져보는 실험이다. 여기서는 누군가가 자백함으로써 상대방의 형량을 늘리고 자신이 석방되는 경우와 함께 자백함으로써 둘 다 형량이 조금 줄어드는 경우, 그리고 아무도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증거불충분으로 최소한의 형량을 받는 경우 등이 제시되고 있다. 즉 넌-제로섬 이론에서는 결말이 강요되는 대신 협력과 우정에 의해 경쟁적 관계를 해소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혹은 모두 공멸할 수도 있다.
iii)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ed. du Minuit, 1984
Bang & Lee: Things That Have Not Come Yet
YOO Jinsang, Professor at Kaywon University of Art and Design
The more complex societies get and the more complex the networks of interdependence within and beyond community and national borders get, the more people are forced in their own interests to find non–zero-sum solutions. That is, win-win solutions instead of win-lose solutions. Because we find as our interdependence increases that, on the whole, we do better when other people do better as well so we have to find ways that we can all win, we have to accommodate each other.
— Bill Clinton, Wired interview, December 2000
Bang & Lee deal with issues of a technology-endemic world in their art: network-based cooperative societies governed by trans- national subjects, a world vision based on information and data that pattern the surface with invisibility and pseudo-visibility, alternative democracy that pursues the dispersion and sharing of the system under the premises of cooperation, and the concept of science history under the extreme technology-based vision and so on. A host of paradigms and layers that define our time and world have been concretized only for about a decade. ‘Technology-based art,’ which has also been called media or new media art, is moving toward a scope of wider creative production, instead of losing a unique paradigm as an art genre as we enter into a technology-based society. Several genres which today we describe as ‘new media’ should probably be classified under a more general name, such as ‘contemporary creation.’ What is for sure is that an artistic approach in this field can no longer be rationalized fully through a technological-customary practice such as the combination of programming and devices. Bang & Lee have been creating art along the boundaries between art, philosophy, play, and technology. Most of all, their ambitious themes will become important across the entire map of contemporary art, and be treated as well as a very rare point of critique.
Protocol
What Bang & Lee primarily attempt to derive from the present world is an order that rules the world we live in. Customarily, such an order can be found in capitalism and social class conflicts, or in imperialism and post-post-colonialism. If not, we will need to mention the equilibrium theory that encompasses them all. Will we be able to discover a consistent rule that can visualize our future fate in a telecommunication hyper-pluralistic democratic society where individual participation and the composite body of transnational technology-politics-industry are heavily emphasized? What kind of form should a minimum norm take in order to actualize a social agreement on cooperation, discussion, organization, and distribution? We probably exchanged our utopia with taboos too early. Actually, that utopia has been endlessly delayed and put off, but has never gone away. It is being endlessly reproduced in the present time depending on contact points of language and the world. The rules that cross the artworks of Bang & Lee can be summarized in three key terms: Non-zero Sum, Living Room, and Friendship. These concepts raise questions about what leads us to believe that co-existence is possible from the beginning.
Non-Zero Sum
Robert Wright asserted in his book ‘Nonzero: the Logic of Human Destiny’ published in 2000, that biological evolution and cultural advancement have been achieved principally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nonzerosumness.’ The concept of zero-sum, which began in game theory, refers to a situation of limited resources in which one person’s gain of resources is exactly balanced by the losses of the resources of another person. Nash equilibrium, a concept invented by John Forbes Nash Jr., Nobel laureate and the main character in the movie A Beautiful Mind, asserts that an equilibrium of power can exist when each person knows the strategies of the others and does their best accordingly. In contrast to this competitive situation, non-zero-sum describes a situation in which nobody loses but everybody can jointly pursue the greatest profit or experience losses together.i) In the identity of Bang & Lee, who presuppose collaboration as a given, the core of their work is cooperation and discussion. The reason why all of their artworks consist of composites is because parts arrive in a given space in parallel, all through dissimilar paths, and following this, they form a whole, like ‘the pattern in the carpet.’ Art is the most optimal system of non-zero-sum; the fullness of a specific point does not give rise to any deficiency in other points. Each participant simply con tributes to the art through a different path. If we expand this notion to the ‘world,’ conflicts and denials can transform into different benefits through well-planned ‘discussions’ and ‘compromises’ and can lead to the concept of a ‘utopia’ that can be redistributed to others. Although no venue for such an ideal discussion has yet appeared, but Bang & Lee call it ‘living room.’
Living Room: Dispatched Stage
Let’s talk in a somewhat theatrical tone: Here is a living room. This living room does not actually exist here; it is projected to this place from a dimension we do not know. In other words, it is not a liv- ing room, but is something like a stage dispatched here from a different dimension. A carpet is laid over the floor of the stage, and two one-person sofas are placed upon the carpet. Cameras and lighting are installed on the stage. These two sofas are then prepared for a discussion to be held. Bang & Lee have been making living rooms throughout a series of exhibitions. They describe their living room as “a place of image, a stage for action, a space of reversal, and at the same time, a space for movies and plays, a stage for life, and a place where the medium of a mirror is reflected.” Living rooms are a place where private autonomy and public regulations overlap; politics, trade, private education and the daily life of families intersect here. Living rooms can be said to be both interior and exterior: more precisely, they are ‘captured outside’ or ‘the interior that repeats the outside.’ Living rooms are like a big trap, a deep sack, an intricately set device, a machine that continually adjusts itself. And here, rather like the apple featured in René Magritte’s <La Chambre d’Écoute>, an elephant fills the inside of the room. To see the elephant at a glance, viewers lying on the sofa have to lower their body and look at the center of the space which occupies most of the room. The outside has entered the inside: humans in the living room are looking at the elephant occupying the center of this private space with its mass and weight, and are discussing it. The elephant, due to its mass and weight, at some point in time goes out beyond the boundary of vision. The thing that cannot be seen at one glance is pressing us, and it fragmentizes our vision. The people in the living room are already sitting toward the outside that is filling the interior, and also toward the outside where the interior has become extinct. The elephant is an animal that does not appear in George Orwell’s Animal Farm. It is one that no ‘friends’ (or ‘animals’) could anticipate, and it has broken in from a place that is outside the scope of ‘friendship.’ It cannot be captured with ‘friendship,’ and it is like an apparition that transcends our vision. From a teleonomic perspective, the ‘living room’ has already been realized somewhere between the future and the past. The ‘living room’ can be said to be a shadow that is projected into the present time from an unheard-of utopian community. In other words, to peek into this utopian community, what can we do? Do we send the elephant out of the room? Or do we need to become a perfect elephant ourselves? And if not then, do we tame the elephant so that it becomes our friend?
Friendship: Cul de sac
Bang & Lee’s <Cul de sac> consists of an interactive lighting de- vice working against external sound. The artwork, consisting of long white lighting tubes, presents the word ‘dead end’, or ‘bot- toms up.’ ‘Cul-de-sac’ is a compound word made of sac (bag) and cul (derrière), meaning the bottom of the back. It is the furthermost part of an interior from the entrance. It can also be interpreted as the interior of the last private area, or it could refer to a boundary that cannot be passed over to reach the exterior. It is the limit of a discussion that can advance no further, and at the same time, it might be a minimal common place where ‘friendship’ is encountered. The ‘sac’ involves a vector of invagination in form. The term ‘cul-de-sac’ also has a meaning of interior production as much as the sexual meaning that the term implies. A thing that is located at the furthermost end of the interior: can we say that Bang & Lee’s strategy is to visualize it and draw it out forward?
Bang & Lee’s other lighting installation work <Friendship is Universal> is in a relationship that causes reverberation with their previous work <Cul de sac>. Friendship can be considered as collusion between the interior and the exterior. Through friendship, we distribute to each other the possibility of impossible existence. Blanchot saw the final form of friendship as death, because, at a dead end like death, the experience of a private moment together is the occasion for the last existence of ‘community.’ii) The failure of communalism will come about when we begin to measure this last community, because it deals with immeasurable things, things that go beyond any database, and things that are heard from places where no one has gone before. All we can do is to look at the extinction of a subject while remaining next to the subject that is passing into extinction.
Bang & Lee’s artwork is an experiment on what kind of freedom will remain for us in a technology-endemic society, or in the world empire of capitalism, or in the network of our general friendships, or in the daily life of the extension of a staged discussion. On account of this, their artwork seems to move toward scenarios that have not yet been reached and that pursue a new type of dramatic catharsis beyond new media. Such scenarios will consist of writings that set out to predict conditions for friendship and collaboration, to actualize a picture of a world that cannot yet be drawn, and to call out things that have not yet been reached, instead of a concrete resolution for converting from the extreme abstractness of the world toward a venue of discussion, or toward the collaboration of a friendship-based non-zer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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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e more complex societies get and the more complex the networks of interdependence within and beyond community and national borders get, the more people are forced in their own interests to find non–zero-sum solutions. That is, win-win solutions instead of win-lose solutions…. Because we find as our interdependence increases that, on the whole, we do better when other people do better as well — so we have to find ways that we can all win, we have to accommodate each other…
— Bill Clinton, Wired interview, December 2000
ii) For example, the “Prisoner’s Dilemma” is an experiment to investigate the best solution to reduce a prison sentence as each of the accomplices who committed a crime together decides whether to confess or not to confess when they are questioned by investigators. Here, three possibilities are suggested to the prisoners: (1) if one confesses, the other accomplice will get a heavier sentence; or (2) if both confess, both get a lesser sentence; or (3) if both do not confess, both will get a minimum sentence due to insufficient evidence. Thus, in the theory of Non-zero Sum, instead of demanding an end result, a competitive relationship can be resolved through cooperation and friendship, and common interest can be pursued, or if not, mutual destruction may result.
iii)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ed. du Minuit,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