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Ye Jin

(b.1985)


학력

2024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소과 박사과정

2014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소과 졸업

2008 국립창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2025 기이한 Weird 하나, 익숙한 둘, 조명박물관, 양주

2024 열명의 나무 가운데 한 아이가 있어요, 봉산문화회관, 대구

2023 자연선택 ∘∴∥∥라는 생물이 ∘⨀⊸∩하게 진화했다,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양구

2022 자연 13구역 지역 재개발 정비사업 프로젝트 : Pre-Design ,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김해

2021 자연(自然)스러운 설계,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김해

2013 감촉의 또 다른 시선, 갤러리이즈, 서울

2012 감각의 시간 - 감촉으로 재구성한 사물, 갤러리비원, 서울


기획전 & 그룹전

2026 KH feelux  라이트아트 소장전, 조명박물관, 서울

2025 광양국제미디어아트페스티벌, 성황스포츠센터 , 광양

         드러남의 논리 ‘The Logic of Emergent’, SPACE315, 서울

         FLOWERS FROM HEVEN, 스페이스776 , 서울

         ITSELF, 아트센터자인, 서울

2024 BBUK: on&off, 프로세스이태원, 서울

         동시대 조각의 파동과 확장, 갤러리코사, 서울

2023 Phuara of Essence, SELECTED MARONG, 서울

2022 ARIST SHOWROOM, 경남도민의집/도지사관사, 창원

         artgyeongnam 2022, 그랜드머큐어앰배서더호텔, 창원

        비결정론적인 비 주기의 흐름, 지웅아트갤러리, 서울

        파트론기획전 ‘자연의 심장박동’ , 파트론디지털센터, 서울

        산림단지조성을 위한 바람직한 증식 법, 평택문화원 웃다리문화촌, 평택

2021 네 개의 방 네 개의 질문,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김해

         닷 닷 다앗’ –도시예술프로젝트, 원주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 원주

         감각의 정원, 평택문화원/웃다리문화촌, 평택

         DMZ문화예술삼매경-Re:MAKER, 강원문화재단/명파비치하우스, 고성

         Plat Flat - 평면 속 입체작품을 만나다, 서정아트센터 x CGV(판교), 성남

2020 ‘K-auction’Preview, 케이옥션아트타워, 서울

         창원조각비엔날레-비 조각 : 가볍거나 유연 하거나, 창원성산아트홀, 창원

2019 항구도시의 만남-동시이역, 523쿤스트독, 부산

         비 조각 프롤로그-가볍거나 유연하거나, 창원성산아트홀, 창원

         창원아시아미술제-상상피크닉, 창원성산아트홀, 창원

         정∙중∙동-조용한 가운데 움직임, 김해문화의전당/의정부예술의전당, 김해/의정부

2018 The Next Big Movement, KIMI ART, 서울

         김해서부문화센터개관기념전-언더그라운드展, 김해서부문화센터, 김해

         INTERCITY-경계의무늬, 김해문화의전당/안산단원미술관, 김해/안산

         GIAF-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 세종문화회관, 서울

2017 POSCO the great artist, 포스코미술관, 서울

         Emergent Property, KIMI ART, 서울

         AKUA ART SHOW NEWYORK, MOKAH MUSEUM, NEWYORK

         조형, 의미와 형태,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광주

2017 산수심원기, 서호미술관, 남양주

        서울국제기획초대작품전-다문화 조형의 산책, 예술의전당/한가람미술관, 서울

그 외 50여회


레지던시

2023 가나아트파크 -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 (현)

2022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 창작스튜디오 17기 입주작가

2021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 세라믹창작센터 입주작가

 

CAREER

2025 필룩스 라이트아트 선정작가

2024 단원미술제 선정작가

2023 가나아뜰리에 입주작가

2022-2023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2020-2021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 세라믹창작센터 레지던시 입주작가

2020-2021 김해문화의전당 - NEW FACE in GIMHAE 선정

2018 세종문화회관 - GIAF 올해의작가 선정

2017 포스코미술관 - POSCO the great artist 선정

        키미아트 - 2017 KIMI for YOU 선정


아트페어

2026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6> 코엑스, 서울

2025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5> 코엑스, 서울

2024 <아트광주2024>김대중컨벤션센터,광주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4> 코엑스, 서울

2023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3> 코엑스, 서울

         <HotelArtshow Changwon 2023> 그랜드머큐어앰베서더호텔, 창원

2022 <HotelArtshow Changwon 2022> 그랜드머큐어앰베서더호텔, 창원

2021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1> 예술의전당, 서울

         <WONJU ART FAIR - 뜻밖의 미술 발견> 치악예술관, 원주

2019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9> 예술의전당, 서울

2018 <ISF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8> 예술의전당, 서울

         <파트론비치아트페어> 양양서피비치, 양양

2017 <SPOON artshow> 킨텍스, 고양

2015 <BAMA2015(JARFO,MOTOgallery)> 벡스코, 부산

2014 <W-ART SHOW2014> 롯데호텔, 서울


공공미술 프로젝트

2025 <서울조각페스티벌-생동의서울 나비의 날개 짓>,뚝섬한강공원,서울

         <춘천MBC-호수가 품은 조각 이야기>, 춘천MBC호반광장,춘천

2024 <여정은 그렇게 그곳으로 춤을 춥니다.>스타벅스 가나아트파크점 ,양주

         <새벽이 흐르는 동쪽 숲> 스타벅스 가나아트파크점 ,양주 

2021 <도시의 형(形) 위에 빛나는 상(Image)> 원주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학성동일대, 원주

         <감각의 정원> 평택문화원 웃다리문화촌, 평택

         <DMZ문화예술삼매경-Re:MAKER> 명파비치하우스, 고성

2015 <한글문화큰잔치 '공감잇기, 한글,예술이다'> 광화문광장,서울


소장

2025 Beauty Up UPCYCLE ‘ Beauty in Natyre’,한국애브비(AbbVie)

        (주) 현대위아 소장

2024 스타벅스가나아트파크점 소장

2023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소장

2022 양구 백자박물관-천개의빛 소장

        나주혁신도시 스카이센트럴 주상복합 건축물미술작품

2021 평택문화원 웃다리문화촌 소장

2019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소장

         거송종합건설㈜ 건축물 미술작품

         고양삼송아이파크 3차 건축물미술작품

         성수동 대림창고 소장

2018 어반어스㈜ 건축물미술작품

         하남미사 힐스테이트에코 건축물미술작품

         ㈜다우케이아이디개발 청계아트리체 건축물미술작품

2017 수원영통아이파크 건축물미술작품


기타

2025 한국조각가협회, 한국기초조형학회 (현)

         한국현대조형작가회 (현)

         경기도 건축물미술작품 심의위원 위촉 (현)

2024 경기도 건축물미술작품 검수단 위촉 (현)

         인천광역시 건축물미술작품 심위위원 위촉 (현)

2019-2023 성신여자대학교 ‘입체와 공간‘, ‘도조기법’ 출강

2018 성신여자대학교 ‘현대조각’ 출강

2014-2016 동대문 진로직업체험센터 ‘순수미술과 조각가‘ 멘토링프로그램 출강

2014 국립창원대학교 ‘서양미술사‘ 출강

2012-2013 광명청소년수련관 ‘입체와 공간’ 출강





Artist Statement

평소 작업의 목표는 어린 시절 기억 속 자연의 모습을 소재로 그 이면을 탐구하고 새로운 자연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며 상상했던 기억들과 감정들을 작품에 반영하려 노력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자연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태이다.

흔히 알고 있던 자연의 모습이 아닌 파악 할 수 없는 형태를 가진 미지의 자연으로, 생명력이 가득한 수많은 개체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이런 자연의 모습은 실재보다 큰 몸짓, 선명하고 진한 색채, 그리고 여러 개체들의 무리로 기억되는 상상력의 부산물로써,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와 색의 조합으로 작품에 표현된다. 결국 작품은 실재 자연의 모습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고, 다른 감각을 통해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귀결된다.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대상의 형태는 보편적이지 않은 상상의 형태와 색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작품의 형상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낯선 사물과 세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것은 본인의 상상력을 통한 변모와 왜곡으로 이루어진다. 

극명한 대비를 나타내는 색과 유기적인 형태는 표현된 대상의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 대상의 실제유무를 파악할 수 없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낯선 감정을 가지게 한다.

 이는 작품이 본인의 기억에서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대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혹여 실체가 있는 사물을 재구성한 것이어도 그 대상을 시각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 그 대상의 물성 즉, 촉감으로 감지했던 생명력에 대한 상상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낯선 감각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부풀어 오르는 발포 우레탄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운동하는 숲의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UV와블러 출력이미지와 자연물 오브제들을 콜라쥬하여 형태를 완성한다. 

작품의 배경에는 에폭시 마블링을 통해 작지만 끝없이 뻗어나가는 생명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치 작은 애벌레를 보고 만지면서 느꼈던 짜릿했던 감정과 살기 위해 꿈틀거리던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작품에 반영하기 위한 표현방식인 것이다.


 기억 속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자연의 모습을 재해석한 작품은 다양한 미술적 기법과 방식을 통해 실재와는 다른 왜곡된 기억과 변형된 이미지로 나타나고 관람자에게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기억 속에 잔상으로 남은 이미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봄으로써 낯선 시선으로 연결된 새로운 자연을 찾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The main subject of my practice is usually studying the other side of nature from my childhood memory and suggesting a new form of nature. In other words, my practice reflects the memory and emotion of my childhood towards nature by remembering how I used to look massive nature by myself and imagined from it. In my point of view, nature does not seem to be static but dynamic in an unfixed and continuously moving form. Therefore, in my work, unlike the common notion of it, nature is unknown and does not have a specific form but numerous vital individuals. This characteristic of nature is depicted in a unique form and combination of colors in my work as a product of my imaginations, remembering nature in a bigger gesture, distinct and strong colors and a crowd of numerous individuals. In the end, this process meets doubts about the real aspects of nature and desires to understand nature in other senses. My works, formed by interpretations of forests and life in nature, would work as a reminder of a new form of nature and the memory about forgotten nature.

Review


이식된 숲, 접속하는 신체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큐레이터 장민현


감각에서 자기-설계로

 신예진의 작업은 감각에서 기원한다. 흙을 헤집을 때 올라오던 눅진한 냄새, 각도마다 번지는 벌레 날개의 미세한 반짝임, 나무에서 퍼져 나오던 두터운 습기, 물가에서 스치던 개구리의 미끈거림, 사체 위 구더기의 조밀한 움직임이 먼저 유년의 몸에 남았다. 그때 몸이 먼저 기억하고 의미는 뒤따랐다. 이때 자연은 인간 삶의 배경이 아니라 인간과 약간 어긋난 채 따로 서 있는 세계로 나타났다. 그 앞에 먼저 서는 것은 관찰의 태도였다. 몸은 단서를 모으고, 거리를 조정하며, 호흡을 낮추었다.

그 경험은 자연을 죽음과 생존의 경계에서도 움직임을 남기는 존재로 믿게 만든다. 그 감각이 가리키는 자연은 사라진 자리에서도 미세한 온기와 습기, 떨림으로 표면을 다시 숨 쉬게 만드는 세계, 즉, 완전히 끝나지 않고 형태를 바꾸며 버티는 존재다.

유년의 숲이 도시 개발로 사라진 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잃어버린 자연을 더듬어 재현하는 데서 시작됐다. 개구리 떼, 나비와 잠자리, 이끼는 레진과 도자, 평면 위에 시각적 촉감으로 재등장한다. 앞선 감각의 잔여를 물질로 붙잡으려는 시도였고, 만지지 않아도 만져지는 표면, 젖은 얼룩, 반사와 투과의 대비는 감각을 색과 재료의 구조로 형식화한다. 이때의 재현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도록 지속 시간을 부여하는 실험이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자연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설계한다면 어떤 형태와 규칙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자연을 약자나 보호의 대상으로 호명하는 습관을 멈추게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더 이상 그려지는 객체가 아니라, 작동 규칙을 생산하는 주체로 전환된다. 신예진에게 자연은 외부 기술을 부품처럼 덧대는 대상이 아니라, 기술을 규칙으로 받아들여 자기 작동 방법을 재배열하는 존재다. 여기서 자기-설계란 자연이 외부의 기술과 매체를 도구로 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들을 잘게 쪼개 자기 규칙을 다시 쓰는 행위다. 자연을 있는 그대도 따라 그리는 모사가 주어진 규칙을 따르는 일이라면, 설계는 그 규칙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이때 자연은 하나의 유기체라기보다 여러 존재가 얽혀 있는 관계-생명체로 보인다. 서로 다른 몸과 감각들이 한 덩어리로 묶였다가 흩어지며 관계를 다시 짠다. 이 지점에서 인간 중심적 시선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자연과 기계, 이식과 접속

 초기에 신예진은 도시와 기계를, 자연을 억압하는 폭력적 기제로 경험했다. 그래서 자연의 원초성과 야생성을 불러내는 이미지들이 치유·의례의 형식으로 자주 등장했다. 이후 DMZ 문화예술 삼매경 《Art Hotel Re:maker》(2021, 고성 명파해수욕장 유휴 공간), ‘원주문화도시축제 닷닷다앗’ 도시 예술 프로젝트 《도시의 형(形) 위에 빚는 상(Image)》(2021, 원주 희매촌 폐허) 등 이러한 구체적인 장소들이 개입되면서, 작업은 자연·도시·기계·사회 구조가 뒤엉킨 감각의 장으로 확장된다. 이때 자연은 피해자 서사를 벗어나, 훼손의 흔적 위에서 환경을 다시 설계하는 행위자로 서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있다. 자연이 기계를 더 이상 ‘외부의 폭력’으로만 두지 않는다. 잘라내는 대신, 자기 몸에 이식하고, 새로운 생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한다. 바로 이때 이식과 접속이라는 두 가지 형식이 드러난다.

이식은 쓰러진 나무, 폐허가 된 건물, 오래된 구조물에 빛·필름·배선·기계 부품을 기관처럼 덧붙이는 작업이다. 이식은 기존 기능을 통째로 대체하지 않는다. 기존의 몸에 다른 리듬을 덧입혀 새로운 생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서 전선과 케이블은 장식이 아니라 기관으로 작동하고, 빛과 필름은 외피의 부속이 아니라 작동 규칙을 바꾸는 설계 요소로 기능한다. 즉, 이식은 ‘하나의 몸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가’에 관한 문제다.

접속은 조금 다르다. 접속은 서로 다른 몸이 각자의 경계를 유지한 채, 필요할 때 연결되고 필요 없을 때 분리될 수 있는 상태다. 서로를 섞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의 방식이다. 이때 자연과 기계의 관계는 사이보그 개념과 만난다. 다만 신예진의 사이보그는 완전한 융합체가 아니다. 자연과 기계는 끝내 하나의 경계 없는 전체로 녹아들지 않는다. 대신 서로에 기대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하이브리드로 남는다. 여기서 사이보그는 특정 형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접속할 수 있고 다시 분리될 수도 있는 운영 태도에 가깝다.

결국 자연의 자기-설계는, 자연이 기술을 받아들여 이식과 접속의 형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식은 하나의 몸 생리를 바꾸고, 접속은 여러 몸이 경계를 지킨 채 맞물려 움직이게 하는 질서를 연다. 여기서 공존은 섞임이 아니라 조율이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가 서로를 지우지 않으면서 차이를 남긴 채 함께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두 장면: 혼종의 숲과 기이한 사마귀

 신예진 개인전 ≪기이한 하나, 익숙한 둘≫은 자연이 기술을 흡수하며 자신을 다시 설계해 가는 과정을 두 장면, 하나의 신체로 펼친다. 전시장은 ‘혼종의 숲’과 ‘기이한 사마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지만, 경계는 완전히 닫히지 않고, 분리된 두 공간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하나의 체계처럼 움직인다. 전시장 입구의 <유충들이 모여 이루어진 산>(2024)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명체의 융기처럼, 곧 이어질 장면의 기류를 미세하게 전달하며 다른 세계로 진입을 이끈다.

 첫 번째 장면, ‘혼종의 숲’은 정지된 숲의 형상을 빌려왔지만, 안쪽은 작동 원리가 드러나는 내부 단면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얽혀 있는 목재와 전선, 케이블, 선형 조명, 영상 장치는 살아 있는 신호와 죽은 물질이 뒤섞인 기이한 생태의 구조물을 만든다. 죽은 목재의 몸통들 사이로 케이블이 근막처럼 감기고, 선형 조명은 공간의 결을 따라 확산한다. 천장에는 잘린 나뭇더미의 영상이 바닥을 향해 투사되며, 빛은 재료들 사이를 잔광으로 더듬는다.

이 숲은 자연과 기계가 섞여 있지만 서로를 완전히 삼키지 않는다. 이미 생을 다한 나무의 신체 위로 기계 장치가 이식되면서, 두 세계는 충돌보다는 묘한 공존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풍경은 숲의 외관이면서, 내부 기관의 단면처럼 읽힌다. 살아 있는 듯, 그러나 생명을 잃은 듯, 유기와 무기의 경계에서 미묘한 맥박이 감지된다. 혼종의 숲은 생명과 무생물, 자연과 기계의 구분이 느슨해진 관계-생명체의 장이며, 관객은 그 리듬을 읽어내는 감각의 관찰자로 남는다.

  두 번째 장면, ‘기이한 사마귀’는 내부의 진동이 바깥의 형상으로 응결한 순간이다. 공간 가운데 거대한 사마귀 <환(幻), 전율하는 눈>(2024)이 놓여 있다. 목재와 폐기된 기계 부품이 완전히 섞이지 않은 채 맞물린 사이보그적 신체다. 바닥의 안개층은 시야를 낮추고, 사마귀 배의 조명은 맥박 리듬으로 외피를 타고 번져 형체를 순간순간 불어 올린다. 공포와 압도는 크기와 자세, 리듬의 주기가 동시에 밀어붙일 때 생긴다. 맥박 같은 빛의 규칙이 표면을 스치고 돌아올 때마다, 사마귀는 한 번 더 커졌다가 수축하는 듯한 착시를 남긴다. 여기서 생기는 불안은 상징의 효과가 아니라 규모, 자세, 리듬이 만드는 물리적 압력에 가깝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면 작은 제단 위에 또 하나의 사마귀 <시(尸), 그것 대신에 앉힌 자리>(2024)가 장면의 중심을 전환한다. 거대한 사마귀가 생명의 압력을 드러냈다면, 제단은 그 압력이 가라앉은 자리, 남은 진동이 머무는 곳이다. 제단 위의 사마귀는 더 이상 포식자의 형상이 아니라, 사라진 자연의 빈자리에 남은 껍질처럼 보인다. 붉은 천은 사마귀 배에서 뻗어 장막처럼 공간을 가르고, 앞선 공간의 모니터로 되돌아가 잘린 나뭇더미 사이를 가르는 붉은 나무 영상에 닿는다. 이 붉은 천은 두 장면을 하나의 몸으로 묶는 혈관이 된다.

 여기서 중심은 상징이 아니라 접속의 질서다. 이 신체는 하나로 융합되지 않는다. 목재, 기계, 안개, 붉은 천이 서로의 리듬을 유지한 채 맞물리고, 때로는 거리를 두며 분리된다. 그 관계는 섞임이 아니라 조율이다. 혼종의 숲이 내부 생리를 다시 쓰는 이식의 장이었다면, 기이한 사마귀는 그 생리가 외부와 관계를 맺고 되돌아오는 접속의 장면이다. 두 공간은 한 신체가 안과 밖을 교차하며 호흡하는 연속면으로 작동한다.

이때 관객의 위치도 달라진다. 앞에서는 관객이 감각의 규칙을 읽는 관찰자였다면, 여기서는 경계가 전도되는 사건을 몸으로 겪는 증인이 된다. 낮게 깔린 안개, 맥박 리듬의 조명, 거대한 규모가 만드는 압력이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흔들며 의례의 시간을 연다. 이곳은 형상을 보는 곳이 아니라, 공포와 경외가 한 번에 들이치는 지점에서 감각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장이다.

결국, 두 장면은 이식과 접속의 이중 구조로 하나의 생리를 완성한다. 하나는 내부의 리듬을 다시 쓰고, 다른 하나는 그 리듬이 붉은 혈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돌아오게 한다. 자연은 기술을 받아들이며 자기 규칙을 다시 쓰고, 관객은 중심이 아니라 그 생리를 통과하는 감각 기관이 된다.


기이한 형식주의와 접속의 윤리

 이 전시를 가로지르는 태도를 ‘기이한 형식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기이함은 특이한 이미지가 아니다. 쉽게 환원되지 않는 형식의 자율성에 가깝다. 신예진의 오브제는 관계와 서사로 완전히 풀리지 않으며, 끝내 닿지 않는 내부를 남긴다. 반사와 투과, 가림과 드러남이 반복되고, 이 느린 노출이 관객의 단정 속도를 늦춘다.

이 형식주의는 자연과 기계, 인간과 비인간을 ‘하나가 되었다’라는 말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대신 이식과 접속의 구조를 통해 함께-살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서로를 지우지 않고 나란히 서 있는 이 구조는, 기존의 자연 재현 방식을 벗어나, 자연이 자기 규칙을 다시 쓰는 장면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전시는 단순한 자연 회귀 서사가 아니다. 신예진의 자연은 이미 도시, 폐허, 기계와 얽힌 자리에서 출발한다.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흡수하고, 어떤 규칙으로 자기 몸을 다시 설계하는지를 묻는 작업에 가깝다. 자연은 상처 입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설계자이자 조율자로 제시된다.

전시는 두 장면과 하나의 붉은 천으로 질문을 응축한다. 붉은 천은 장식이 아니라 구조다. 길이자 연결선으로서 이식된 기관들을 묶고, 서로 다른 개체들이 접속과 분리의 타이밍을 조율하는 신경망처럼 기능한다. 관객은 이 선을 따라가며, 이식과 접속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호흡에 동참한다.

결국 전시가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명확한 메시지가 아니라 상태와 전이의 감각이다. 잔해에서 주체로, 무덤에서 제단으로, 파괴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미세한 이동. 익숙한 둘—자연과 기계, 인간과 비인간, 안과 밖—이 배경으로 물러나며, 기이한 하나가 모습을 드러나는 순간. 그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 그 장면을 함께 감당하고 증언하는 목격자로 남는다. 전시는 그 목격의 자리를 잠시 마련해 둠으로써, ‘자연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선택하는가’라는 물음을 ‘우리는 어떤 규칙을 다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조용히 전환한다.







숭고한 도시생태학- 상상의 도시/숲


김성호(미술평론가, Sung-Ho KIM)


 유리 상자 안에는 작가 신예진이 상상으로 일군 신화의 세계로 가득하다. 전시장 중앙에 뿌리를 드러낸 채 육중한 자동차 엔진을 안고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나무, 그 주위로 높거나 낮게 쌓아 올린 하얀 도자기 탑, 포그머신을 통해 바닥을 잠식하면서 뿜어져 나온 운무 효과, 그것들을 비추는 강렬하거나 은은한 조명, 전시장에 흐르는 형언할 수 없는 신묘한 사운드!

 신예진의 설치 작업은 그것 자체로 동시대에 구현하는 ‘도시/숲’이라는 거대한 신전이 된다. 도시/숲? 신전? 작가가 기계 덩어리를 뿌리로 감싸 안은 ‘서낭당의 신수(神樹)’를 중심으로 신령한 도자기들이 거대한 우주의 궤도를 따라 집적, 도열한 듯한 ‘도시이자 숲’인 낯선 풍경을 만들어 시원(始原)의 성소(聖所)로 변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자. 신의 노여움을 받은 것이겠지? 마치 형벌처럼 나무뿌리가 머리를 든 채 중력을 거스른 상태로 매달렸으니까. 아니야! 신의 자비를 받은 것이지! 기계 심장을 안고 부활한 저 나무를 보면 알 수 있어. 그래? 그런데 인간이 왜 신에 저항하지? 백색 도자기들이 하늘을 향해 집적되면서 신에 대항하는 바벨탑처럼 올라가고 있잖아. 아니, 아니라고! 신께 경배드리는 거라고! 그건 바벨탑이 아니라 인간의 최고 산물인 예술품들을 구슬처럼 하나의 바늘에 꿰어 쌓아 올린 숭고한 재단이란 말이야.

 관람객마다 각기 달리 보이는 신예진의 전시는 신과 인간이, 자연과 도시가, 상상과 현실이 그리고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맞닥뜨리는 심리적 장소성을 획득한다. 그녀가 ‘우뚝 솟아있는 나무들이 가득한 산’을 맞닥뜨렸던 어린 시절의 강렬했던 경험과 기억을 ‘지금, 여기’에 상상력으로 소환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안다. 상상, 상상력이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축적된 현실에서 작동하는 ‘꿈꾸기’라는 것을 말이다. 당시 어린 소녀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한자 의미처럼 산의 풍경을 자생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대신 “누군가 나무와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라고 하는 동화적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는 ‘산’이란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 대신 산신 혹은 거인이 만든 창조물로 이해되었으리라.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따르면, 과거로부터 발원하고 현재에 인식되는 ‘이미지-기억(souvenir-image)’이란 어떠한 작위적인 노력 없이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저절로 인간 주체에게 보존되었다가, 현재의 자극이나 요청에 따라 자유롭게 이미지 형태로 떠오르는 기억이다. 그것은 ‘머리로는 어렴풋하지만, 가슴으로 선명한’, ‘순수 기억’(mémoire purifiée)으로 남아 미래를 향해 지속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가 된다. 작가 신예진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미지 기억’, ‘순수 기억’으로 떠올려 현실화하는 동화적 상상은 이질성(heterogeneity)이 한 덩어리로 만나는 ‘이미지 복합체’로 구현된다. 즉 신령한 신과 욕망 가득한 인간이, 알레고리가 가득한 신화와 은유로 가득한 동화가, 원초적 자연과 인공적 도시가 그리고 무한한 상상과 유한한 현실이 신예진의 작품 안팎에서 시공간적 만남을 지속한다. 그것은 과거를 먹고 사는 현재가 미래를 향해 펼치는 무한의 상상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작가 신예진이 던지는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가 오늘날 사회생태학(Social ecology) 담론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즉 “자연이 인간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으로 기계문명을 받아들인다면?”이라는 질문과 더불어 “산과 숲의 황폐화 과정을 거꾸로 해석하여 기존의 도시를 개간하고 다시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는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간략히 말해 인간과 인공으로부터 사회생태학적 사유를 성찰하는 것이다.

 사회생태학이란 기존의 심층생태학(Deep ecology), 정신생태학(Spiritual ecology)이 주창해 온 ‘생물 중심적 평등주의(biocentric egalitarianism)’, ‘반인간중심주의’ 및 ‘반이성주의적 접근’에 대해 비판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회복시키는 관점의 생태학이다. 즉 사회생태학은 환경 대재난의 시대에서 인간의 이성은 거부될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모두를 위해 더욱 진보시켜야 할 무엇으로 간주하는 시도가 된다. 그래서 머천트(Carolyn Merchant)나 북친(Murray Bookchin)의 주장처럼, 사회생태학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작용’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화두로 ‘인간의 인간 지배의 역사’마저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군국주의, 자본주의, 산업주의 등 인간 욕망이 낳은 사회 맥락 속 생태적 위기까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다. 작가 신예진이 인공의 유리 상자가 설치된 문명의 현실계 안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서 구현한 자연 풍경은 ‘산업 문명을 받아들인 자연’을 가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지를 무한대로 상상하고 실험하는 사회생태학적 사유의 장이 된다. 자연목, 자연의 디지털 이미지가 새겨진 세라믹, 도형과 입방체로 전환된 자연, 나무의 심장처럼 자리한 자동차 엔진, 조명, 안개 장치와 더불어 신묘한 사운드 장치로 구현된 숭고한 제단 형식은 이러한 사유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차원에서 ‘상상의 도시/숲’을 구현하는 신예진의 전시는 자연 이미지를 인공의 사회적 맥락 속에 가져와 오늘날 사회생태학적 담론을 성취하는 ‘숭고한 도시생태학’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








 

∘∴∥∥라는 생물이 ∘⨀⊸∩하라

신예진의 ‘관계­생명체’들이 전하는 생태적 예술론

 

김종길 (미술평론가)


“나무, 균류, 인간과 박테리아 사이의 놀라운 상호 의존성은 빙산의 끄트머리 조각에 불과하다.”

제이슨 히켈


1. 인간 아님에 ‘사람’이 있다

 신예진의 미술세계는 ‘아니마(anima)’와 연결된 ‘관계­생명체’들이 우리 눈앞에 환영처럼 현현하는 신비롭고 놀라운 이야기다. 이때 ‘관계’는 자연과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과 테크놀로지, 자연과 그 무엇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 중심의 확장적 우주다. 그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전복하는 생태적 예술론을 펼쳐왔다.

 그가 2012년에 보여준 애니메이션 <Forest-Motion Drawing>이 자연에 깃들어 있는  순수한 생명현상의 플랙탈 질서라면, 올해 입체설치로 보여준 <기계를 만진 어린나무>는 자연에 깃들어 있는 아니마, 그러니까 생명․정신․영혼에 덧대어 살아난 사이보그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제 테크놀로지 기계문명을 파괴와 혐오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이보그는 자연을 주체화하는 ‘페미니스트 사이보그’로 부활하는 중이다.

도나 J. 해러웨이는 “우리 시대, 신화의 시대인 20세기 후반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로, 이론과 공정을 통해 합성된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 곧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정치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기작품에서 신예진은 인간의 기계문명(혹은 도시문명)이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억압적 기제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자연이 가진 원초적이고 야생적인 현상에 집중하면서 그가 체험한 ‘내부섬광’의 번쩍이는 빛을 치유하는 기생물로 곧잘 등장시키곤 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들을 구분하거나 밀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작품에 수용함으로써 그 억압기제의 폭력성을 무력화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들도 자연물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유기체로 변화해 간다. 자연과 기계의 트랜스포머가 일어나는 것이다. <기계를 만진 어린나무>는 그런 측면에서 아주 놀라운 작품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는 애니미즘에 근거해 ‘사람(person)’과 ‘인간(Human)’을 달리 본다. 그는 “세계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되, 그중 일부만 사람이고, 생명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서 ‘사람’의 의미를 모든 존재자로 되돌린다.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특정한 종을 가리키는 말이잖은 가. 사람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달리 부름으로써 모든 존재자들로부터 ‘버림’ 받았다.

 신예진이 구상하는 예술도 모든 존재자들에 관한 상상에서 비롯한다. <감촉의 기억들>(2012)은 ‘생명의 충만함과 경이로움’을 표현한 것인데, 올해 박수근미술관 전시장 입구에 시트지로 새긴 <하얀 껍질로 철갑을 두른 충(蟲)의 노래>도 작은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아니 폭발하는 ‘흰 빛’의 성스러움을 보여준다. 맞은편 벽에 분필로 드로잉 한 <유층들이 모여 이우러 진 산>도 그가 스스로 체험하고 느낀 ‘내부섬광’의 빛일 것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가 말하는 ‘내부섬광’은 어린 시절의 신예진이 체험한 번쩍이는 빛에서 비롯한다.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자주 ‘어린아이’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체험과 느낌에서 시작된 작품들을 ‘작가노트’로 적어서 들려준다. <감촉의 기억들>은 개구리들이 떼로 뒤엉켜 있는 것을 본 어린아이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것이고, <낯선 감촉>도 어린 시절에 개구리를 만지고 놀았던 감촉을 표현한 것이다. <생명의 운동들>은 개구리의 감촉에서 느낀 생동감이다. 개구리만이 아니라, 그는 나비와 잠자리에서도 충만한 생동감을 얻었다. 그런 생동감은 생명의 이미지를 더 크게 상상케 한다. <swarming with Grasshoppers>는 하나의 알에서 수만 마리의 생명들이 뻗어나가는 순간을 크리스탈레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 눈으로 바라본 자연의 색은 어른의 눈으로 본 것보다 훨씬 깊고 진한 색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작은 숲이었지만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때의 풀숲은 끝이 없는 우주와도 같았고, 그 속에선 수많은 생명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린아이였고, 그 어린아이의 내부에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번쩍이는 섬광(閃光)이 일었는데, 그것들은 생명이요, 생명의 색이요, 빛이요, 발화요, 율동이요, 알이요, 우주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그것의 ‘충만함’과 ‘경이로움’으로부터 작품을 일으켰다.

 그가 해 온 작품들 중에서 <방사환상형 자연설계망>은 그의 ‘내부섬광’ 체험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 아닐까 한다. 투명 레진을 겹겹이 쌓아 올리되,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끝없이 뻗어나가는 이 작품은 이후의 작품들로 이어지는 ‘원형’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산수를 항해하는 노(櫓)>는 그것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다른 것은 <산수를 항해하는 노(櫓)>가 불교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2. 더불어 사는 공생의 세계

 애니미스트들은 동물과 식물, 강과 산까지도 객체가 아닌 스스로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접근한다. 인간과 똑같이 자신만의 주체성을 갖고 있고, 세계를 감각하고 경험하는 주체로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예진도 자연이 스스로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을 ‘재개발’하는 상상을 펼친다. 자연이 주도하는 ‘재개발’은 인간들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개발논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문명을 치유하면서 되돌리는 공생의 무위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비인간 동물과 식물의 자리를 생각해 보자. 생태철학자 유기쁨은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에서 “인간과 ‘동물-사람’, ‘식물-사람’이 함께 거주하는 세계의 모습”을 현실계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예진의 <유충들이 모여 이우러 진 산>은 여럿이 조화되어 한 덩어리를 이룬 세계다. 모든 생명들이 어우러져 한판을 크게 이룬 세계다. 사실 그 안에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현실계보다 먼저 예술계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함께 더불어 ‘거주하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자세>는 “잡종의 모순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인간/기계, 유색인/백인, 여성/남성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모든 차별받는 타자들을 대변하라!”고 외친 해러웨이의 철학을 보는 듯하다. 신예진이 펼쳐 놓은 이 작은 자연물 오브제들은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정체성’으로 살아있다. 잡종의 모순적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있음’의 경이로운 생명현상을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놀라운 작품은 <기계를 만진 어린나무>이었다. 전시장 깊숙이 들어가 <기계를 만진 어린나무>와 마주했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보고 기겁했다. 컴컴한 방에 몸을 뒤틀며 웅크리고 있는 그 거대한 용 한 마리는 무지막지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꿀꺽 삼켜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용이라 했으나, 그렇게 보였을 뿐 그것은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 같기도 했고, 오래된 숲을 어슬렁거리다가 잠든 신화 속 짐승 같기도 했다.

그런 놀라움을 뒤로하고 다시 천천히 작품을 살폈다. “진화의 원동력이 유성생식이 아니라 세포 내 공생에 의해서 추동된다면, 호모사피엔스인 인간의 몸은 수많은 반려친족이 뒤엉켜 살고 있는 하나의 행성이다.” 라는 말이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기계를 만진 어린나무>는 사이보그 짐승이었다. 인간들이 만든 사원과 불상을 벵갈보리수 뿌리가 휘감아 버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버금가는 작업이었다. 어린나무는 기계문명을 휘감아 큰 둥치를 이뤘다. 그 스스로 기계와 하나를 이루며 행성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애니미즘적 미술세계가 이룬 하나의 경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린나무가 ‘스스로’ 기계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저 휘감아 버린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온전히 ‘하나’를 이룸으로써 나무와 기계가 한 몸의 유기체로 살아 올랐다는 점이다. ‘나무’라는 주체의 세계, ‘기계’라는 객체의 세계, 두 세계가 서로를 보듬어 경계를 허물었다. 이곳에 주체와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롯이 의미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3. 폐허에 세우는 ‘관계 맺음’의 연결

 그가 예지하는 세계는 도시의 폐허다. 도시가 사라진 폐허에 땅이 드러나고 풀이 자라는 상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또한 기억하는 자연에서 예술하는 자연으로 도약하는 상상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애니미즘적 세계관과 실천을 통해 살아 있는 세계의 생명성을 다시 상상하고, 관여하고, 참여하고,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초대한다.

 함께 살아가기는 관계적 존재론일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동일성과 차이에 대한 물음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우리와 그들을 다르게 만드는가? 무엇이 우리와 그들을 하나로 묶는가?

애니미즘은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와 타자를 연결하는 믿음이 필요하고, 인간과 인간 외의 존재들이 서로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관계 설정도 필요하다. 새로운 애니미즘적 세계가 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예진은 애니미스트 수렵인에 가까운 예술가다.

 그는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기계적 생명성을 혼합하고 연결하는 ‘관계 맺음’을 시도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듯이 살아있는 생명체로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세에 처한 21세기 지구인에게 가장 시급한 말머리 화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