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 Jongseok
윤종석 (b.1970)
1997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
2000 한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개인전
2018 날개 밑의 바람, 소피스 갤러리, 서울, 한국
2016 New. Dimension-Julia Gallery, Taipei
pli-주름_롯데백화점 월드타워 잠실점
나의 10년의 기록, 충무아트홀 갤러리, 서울
2015 That Day_갤러리 현대 윈도우_서울
2013 우아한 세계_아트사이드 갤러리_서울
2011 보통의 존재_린다 갤러리_싱가폴
2009 Camouflage_아트사이드 갤러리_서울
2008 숨겨진 이면 속에 드리워진 그물_아트사이드 갤러리_북경_중국
2006 삶을 담은 드로잉_Arcicultural Studies Center_까라라_이탈리아
2005 꽃, 일상_아트사이드 갤러리_서울
2003 꽃_MA갤러리, Pentagram 갤러리_후쿠오카_일본
2001 순수한 모순_롯데화랑 창 갤러리_대전
1998 몽환적 시간의 발화_서경 갤러리_서울
1997 꿈꾸는 시간_도올 갤러리_서울
기획 및 단체전
2018 전환의 봄 그 후 , 대전 시립미술관, 대전
Touchable Scene (김남표, 윤종석 2인전), 장흥아트파크,양주
2017 심상풍경(김종구, 윤종석 2인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집적된 시간에 내재한 은유 (심수구, 윤종석 2인전), 갤러리 양산, 부산
2016 어머니-처음으로 사랑한 사람, 제주도립미술관, 제주
길상(吉祥), 가나아트 부산갤러리, 부산
2015 That Day_갤러리 현대 윈도우_서울
길_차이속의 연대, 아트센터 쿠, 대전
2014 창원 아시아 현대 미술제, 성산 아트홀, 창원
장場 자연. 과학. 예술의 혼성, 나로 우주센터 우주과학관
2013 한국 현대 회화 작가 전, 강동아트센터, 서울
코리아 투모로우, 예술의전당, 서울
송명진-윤종석, 세솜 갤러리, 창원
2012 미술경작,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미술과 놀이_동물사육제, 예술의전당, 서울
2011 점으로부터, 인터알리아, 서울
코리안 아이, 국회의사당, 서울
2010 Every Time I Look Around, 아시아 아트센터, 대만
Wow! Funny pop, 경남 도립 미술관, 한국
Defence Mechanism, TN 갤러리, 북경
과정을 묻다, 모란미술관, 남양주
2009 손길의 흔적-The Great Hands, 현대갤러리, 서울
코리안 아이-Moon Generation, 사치갤러리, 런던
2008 MEME Trackers, 쏭좡 미술관, 중국
여성적 감수성,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2007 Ways of Seeing, STAR갤러리, 대만
청 풍 이 명 월, 이안 갤러리, 대전
2006 흔들리는 나무의 독백,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x-ray, 대청호 미술관, 충북
2005 자연발화, 반지하 갤러리, 대전
Art & Issue, SOKA 갤러리, 중국
2004 내포 현대 미술제, 홍주문화회관, 홍성
예술가의 상자를 열다, S-갤러리, 대전
2003 대전 아트 페스티발,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흑, 백의 모놀로그, 상 갤러리, 서울
수상
대전광역시 초대작가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및 특선
대한민국 청년 비엔날레 청년 미술상
롯데화랑 유망작가 지원 프로그램 선정
2006_화랑미술제 Best Top 10_작가 선정
레지던스
베이징 아트사이드 스튜디오
장흥 가나 스튜디오
파리 씨떼 예술 공동체
타이페이 아티스트 빌리지
소장처
코오롱, 하나은행, 외교통상부, 두바이왕실, 벤타 코리아, ㈜파라다이스 , 아트센터 쿠, 가나아트센타 대전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보바스 기념병원. 골프존 문화재단. 제주 현대 미술관. 스텐다드 차타드 은행. 국립현대미술관_미술은행. 수원 시립 미술관. 롯데 뮤지엄
Artist Statement
순간의 늪
사라지는 것이 아닌 지나간 순간으로
결국 기억의 끝을 잡은 모양새로 점점 깊이 빠져든다.
매일 매일 흙을 모아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다시 허물고
또다시 쌓고 그러길 반복하죠.
재법 큰성을 쌓은적도 있었지만 갇혀 있음에 답답해 결국 내 손으로 부수고 다른 성을 쌓으려고 매일 매일을 몸을 씁니다.
뭐하는 짓인가 싶고 하루 하루를 소비한다는 생각에 지치고 힘든 날들이지만 술한잔으로 나를 위로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시작하지요.
이것이 내가 작가로 살아가는 거지요
작업을 하다보면 버려지는 물감이 생기는데 마치 볼펜 똥 같은 녀석들을 모아 놓는 통이 있다. 이것들이 모이면 걸러내서 재사용하고 또 모으고 하다보니 껍질이 재법 두꺼워져서
볼래의 틀이 없어도 물감통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놈 처럼 기생하는 것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의 삶을 원한다.ㅋ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져 나오거나 만들어지는 부스러기들이 내 작업이길 원해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목적을 위한 이해의 도구 일수도 있고 내 몸에 베인 독특한 버릇에서 비롯된 것 일 수도 있으나 그저 순간 일뿐.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노무현의 손,
그의 손동작이 기침 때문에 입을 가리는 듯, 아니면 얼굴을 가리는 듯 한 사진에서 난 생각한다.
말을 참는 듯한 침묵의 순간을...
삶을 살아가는 한사람으로써의 인간의 주변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 멀리 있지도 않고
서로 떨어져 있지도 않은 것들의 조합
아내가 말한다.
그렇게 담배 피고
술 마시고
그림 그림 그리냐고. 그게 내 삶이다
우리는 스치듯 인생을 살고 있고
시간 앞에서 모든것은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알고 있다.
마지막까지 가야만내것이 보인다는 것을.
하지만 지친다.
나는 왜 점을 반복적으로 찍고 있었던 걸까?
그후 왜 또다시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점은 어릴적 논농사때 도와드리던 모내기의
모심기 동작이 떠올랐고
선은 어머니가 모시 천을 짤때 베틀에서 좌우로 움직이던 씨실꾸리(?)의 방식이 연상된다.
과거의 나를 찾아가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현재는 과거를 만날수 있는 자료이며 과거는 미래를 유추할수 있는 근거이다. 세상을 샬아가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현재 내가 선택한 어떤것과 과거의 같은 날짜에 역사를 찾아서 서로 혼합과 해체를 통하여 한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 지를 보여줄수 있듯 싶다.
결국 사회속의 한 인간의 취향 저격.
하지만 결국 모든것은 내가 존재할때 의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떠나서는 무의미ㅡ덧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될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의 이미지 채집의 취향이 순수히 나의 뜻에 의해서만 만들어 졌겠는가? 모든 것은 주고 받고 교육되는 지점 이겠지.
매 순간, 매일 무언가를 삶에서 발견할것이다.
그리고
조작된 하루를 만들 것이다.
생각한데로 보는 것이 아닐지도 모는다.
보는데로 생각이 시작되고 미칠 것이다.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
아침이면 산책을 하고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어떤것들을 카메라에 담아오며
컴퓨터에 사진을 가지고 놀다가 작업으로 옮기며 작업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영화 한편 골라보고 페북을 하다가 잠이 든다.
반복되는 일상.
하지만 비슷 비슷한 일상중에 조금씩의 차이를 발견하기도 하고 같은 풍경 같은 사물들을 보다가도 어떤날은 다르게 나를 자극하거나 말을 건낸다.
그것들이 내 작업의 단초다.
기록되는 삶의 그것.
그러나 이런 기록이 혹은 기억이 어떤 의미가 있으랴! 그저 나 대신 삶의 속성중 덧없음을 말해주리라~~
나를 건들고 시선을 사로 잡던것들이 내가 살면서 모아온 것들이 바로 당신이 보는 그것이라고.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물. 풍경. 사람, 이러한 것들중에 어떤 것들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지 내 삶의 이미지들을 찾는다.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향들이 나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기억의 채집인 셈인데 이것은 내 삶의 기록이며 내 과거의 흔적을 찾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들은 일련의 채집된 기억들에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덧없음을 의미하기 위한 것이다.
밖에 나가면 뭔가 할수 있을듯 하여 작업실로 달려가고픈 맘에 안달이 나고
정작 내 자리에 있으면 몇분을 버티지 못하고
주사기를 던져 버리고 애꿋은 담배만 죽이는 구나
Review
세상의 끝, 존재의 시작
김민기(대전시립미술관 전시팀장)
윤종석의 작품을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살펴보면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의 끝을 바라보고 동시에 이 세상의 끝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서로 상호적인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원의 틈을 직시直視하고 새로운 회화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한, 동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큰 실체를 다차원적인 시공간 개념으로 탐구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다루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 사회로부터 빗겨 나 있는 다른 차원의 회화세계를 열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은 한 화면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로 분할된 화면구성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작품을 보면 서로 상이한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 두 이미지의 경계 어딘가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시선을 숨겨 놓고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이며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들은 그냥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날의 잔상(0713)’ 작품을 보면 그 어떤 관계성도 찾아보기 힘든 앵무새와 촛불이 한 화면에 상하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작가의 말을 들어 보면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그 연관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예쁜 새 한마리가 눈에 들어와 카메라에 담고 보니 발목에 고리가 달려 있어서 날개가 있지만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중국의 인권운동가 ’류사오브‘가 당국의 감금 결정으로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중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를 애도하는 촛불이 불탔다.’ 라고 말한다.
이처럼 작가는 일상을 살면서 주변을 보고 듣고 느낀 주관적인 시각에 들어온 개인적인 이미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찾듯이 다시 들춰내고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세상의 끝,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었던 그날의 일반적인 사건, 기록, 정보의 이미지를 개인적인 상념想念의 연장선에서 찾아내고 한 화면에 위아래로 병치시켜 놓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서로 다른 이미지를 한 화면에 개입시킴으로서 파생되는 또 다른 차원의 이미지 시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두 개의 이미지는 자신이 촬영한 개인적인 이미지와 누군가가 촬영하고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는 누가 선택하고 촬영했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시간성이 달라지는데 그것은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 늙지 않는 영원성을 부여받기도 하고 이 세상 어딘가에 실체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의 불변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 공통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세상을 읽어내기 위한 일상에서 촬영한 이미지와 인터넷에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가 작가의 개입, 혹은 선택에 의해 한 화면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기 시작한 그 시점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화면을 병치하다가 생긴 면과 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은 마치 이 두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숨겨놓은 차원 밖의 시공간이다. 그리고 모든 화면 처리는 그 경계를 더 깊은 차원으로 숨겨 놓듯 가로로 일정하게 그은 무수히 많은 가는 선을 쌓아올리며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 선들은 마치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파도치며 자신에게 다가온 시간을 아주 작게 분할시킨 회화의 시간으로 옮겨놓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프랙탈과 같은 시간의 반복성과 공간자기유사성 空間自己類似性을 갖는 규칙성과 연관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이 경계에서 그동안 작가가 살아오면서 세상을 바라본 가슴을 울리는 깊고 예리한 시선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작가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은 현실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를 동시에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막연하게 먼 곳에 있는 허상을 쫓기보다는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현실과 비현실 틈에 존재하는 허체(虛體)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 허체가 그 경계 어딘가 있는지 모르지만 허체를 발견하는 순간 오래전부터 이미 현실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밀려오는 허무와 혼란을 경험한 작가의 시선을 통해 실체와 허체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차원 사이에서 예술의 근원적인 개념을 찾고자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윤종석 작품의 중심에는 점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캔버스에 마치 점과 공간을 동시에 존재를 부여하듯 점을 찍는 방식으로 세상에 떠도는 이미지를 화면으로 옮기며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를 구축해왔다. 하지만 최근에 선보이는 선 작업은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떠도는 이미지에 시간을 부여하며 누구도 가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문을 열고 있다.
윤종석은 점, 선, 면이라는 회화의 근본원리를 갖고 세상의 모든 현실과 자신의 예술세계를 접목시키는 독특한 회화 방식을 탐구해왔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고 바라본 세상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이미지를 선택하고 화면과 점,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이미지의 시간성을 다시 선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세상이던 아니면 세상 밖이던 어딘가에 존재하는 모든 실체와 허체사이에 숨겨진 회화의 본질을 특유한 이분법적인 구성으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동안 점을 찍기에 효과적으로 용이한 기존 캔버스 방식에서 벗어나 선을 긋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선이 갖는 조형성과 상이한 이미지를 효과적인 표현하기 위해 특수한 투명 아크릴 판을 사용하고 있다.
바탕을 다른 물질로 바꾼 것은 선 작업에서 경계에 있는 숨겨진 허체를 찾기 위해 이중나선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인데 여기에 또 다른 장치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투명 아크릴 판 뒤를 보면 앞면 이미지와 연관된 색면色面이 가는 선으로 빼곡하게 그어져 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멀지만 가장 가까운 거울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책장을 넘기는 방식으로 디스플레이가 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점과 점 사이에 시간을 부여한 선이 다시 모여 공간을 이루고 투명한 아크릴판을 경계로 제일 먼 것 같지만 제일 가까운 시공간에 모든 시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고질痼疾적인 회화의 한계, 즉 2차원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서 마치 모든 퍼즐을 하나로 맞춰 나가는 윤종석만의 회화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책장을 넘기는 방식은 일반적인 회화에서 이타적인 디스플레이일지는 모르지만 회화인데도 불구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윤종석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회화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적절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드디어 회화로 전환시킨 시간성 하나로 자신이 바라 본 이 세상 모든 것을 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간이 곧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는 것은 공(空)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空)에 점은 존재이고 존재에 시간을 부여하면 그 사이(間)가 바로 선이 된다. 점과 선에 의해 공(空)은 비로소 시공간(時空間)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어디 든 갈 수가 있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모든 차원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 선들 이야말로 미지의 차원을 열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선 작업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부분 답답한 현실의 괴리감과 그래도 숨통을 조금 열어준 자신의 안식처와 같은 일상의 사이에 존재하는 작가의 고뇌가 녹아 있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괴리감은 사실 그 실체가 없다. 오직 실체를 좇아 증명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을 파고드는 보이지 않는 불안이 바로 인간의 오감을 감싸고 있는 공포의 실체이다.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생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협하는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나면 불안해지는데 불안하게 떨리는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되돌아보고 발견하게 된다. 그 불안한 감정이 사회에 있는지? 혹은 자신에게 있는지? 잘 모르지만 삶의 방식이 모두 다르듯 불안한 심리도 각양각색이다. 여기에서 객관적인 개인의 불안감과 누구나 다 똑같이 느끼는 사회적인 괴리감은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극명한 차이가 있다.
윤종석 작가가 선으로 표현한 이미지는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한 채 떠돌다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선들은 그가 경험한 세계이며 모든 공간을 함축한 경계이다. 그리고 이미지와 연결된 점, 선, 면, 공간이야말로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가장 찾고 싶은 동시대 예술의 근원적인 본질일 것이다.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어딘가를 향해 외치는 독백과 같은 미세한 감정을 숨기고 있는 작가의 숨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선들은 현대사회 구조에서 최면에 걸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리는 회귀하는 선들이며 시간을 매개로 세상을 들여다본 내면의 침묵이며 행동할 수밖에 없는 절규이다.
윤종석은 그동안 충분히 현실을 직시했고 새로운 시공간을 찾기 위해 거쳐 온 고단한 시간만큼 회화의 경계를 넓혀 왔다.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자신을 인정하려는 방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의 숙명이자 사명일 것인데, 자신의 내면 깊이 숨겨 놓은 자아로부터 꼼꼼히 고뇌하고 슬퍼했던 시간만큼 쌓아 올린 선의 흔적만큼 이 시대의 이면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년 넘게 윤종석의 작품을 본 필자의 짧은 글로 모든 작품을 논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누구도 가보지 못한 회화세계를 개척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미지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회화의 기본 구조를 뛰어넘어 시간성을 끌어들이고 전혀 다른 이미지의 존재론적인 고찰과 회화의 본질을 점, 선, 면이라는 기본 원리로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고집스러운 작가의 태도 속에 회화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본다.
현실을 파고드는 시간 순례자 윤종석 작가에게 실체와 허체의 경계에서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 고독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 묵직함이 세상을 향한 묵언이자 자신의 독백이며 더 나아가 그 무게만큼 견뎌 온 삶의 무게이다.
혼란스러울수록 실체와 허체의 양쪽 모두를 이해하는 작가의 태도를 보면 이분법적으로 흑과 백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해졌는지도 모른다. 처음에 선을 그었던 시작점이 바로 존재의 시작이며 앞으로 계속 그을 세상의 끝 사이 어딘가에 현실을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그 선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 모르지만 선을 긋는 시간만큼 긴 숨을 쉬고 고즈넉한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끝까지 바라보기를 기대해 본다.